2000년 초 인터넷기업협회 회장직을 맡아 정보통신(IT) 혁명을 주도했던 '닷컴 스타' 이금룡(53) 이니시스 사장. 그는 20여년을 삼성물산에서 일했던 굴뚝기업 임원 출신이다. 그런 그가 넷 키드가 주류를 이루는 신경제의 주역으로 변신하기까지에는 미국 아마존닷컴의 랜디 코바 부사장과의 인연이 큰 몫을 했다.인터넷 산업이 급부상하던 1998년 말. 이금룡 당시 삼성물산 이사는 인터넷의 가능성을 확신하고 인터넷 쇼핑몰인 삼성몰을 개설했다. 이씨는 삼성몰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세계적인 닷컴 기업과 제휴를 맺어야 한다고 판단, 온라인 서점 아마존닷컴에 주목했다. 하지만 한국의 신생 쇼핑몰이 미국 증시를 쥐락펴락하는 아마존닷컴과 제휴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도 밀어 부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시도조차 하지 않고 포기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어요."
예상대로 아마존닷컴과 연락하는 것 조차 쉽지 않았다. 이메일로 사업제휴 제안서를 제프 베조스 최고경영자(CEO)에게 수차례 보냈지만 단 한차례의 답장도 오지 않았다. 그는 아마존닷컴 본사가 있는 미 시애틀의 삼성물산 지사에 도움을 요청해 간신히 미팅 기회를 얻었다. 그렇지만 삼성 시애틀 지사측은 "아마존닷컴은 하루에도 수차례 비즈니스 미팅을 갖는다. 큰 기대는 하지 말라"고 귀띔했다.
이씨가 시애틀 중심가에 자리잡은 아마존닷컴 본사를 찾았을 때 처음 대면한 인물이 바로 랜디 코바 해외영업 담당 부사장. 해외사업 제휴에 관한 결정권자였다. 이씨가 긴장과 설레임으로 미팅 테이블에 마주 앉자 마자 랜디 코바는 "아마존닷컴이 왜 삼성몰과 비즈니스를 해야 하는지를 설명해달라"고 요청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내세워서는 차별화가 되지 않겠다고 판단한 이씨는 비전과 열정을 보여주는 데 주력했고 예상은 들어 맞았다. 랜디 코바는 즉석에서 "당신의 제안을 수락하겠다"고 답변했다.
이후 이씨는 랜디 코바와 만나면서 사업가로서의 재능 뿐 아니라 인간적 매력까지 발견했다고 한다. 랜디 코바는 명문 스탠퍼드대 출신으로 제프 베조스와 함께 아마존닷컴을 창업한 7인의 멤버 가운데 한 사람이다. 30대에 부와 명성을 거머쥔 유명 인사답지 않게 겸손하고 친절했다. 랜디 코바는 기업은 고객을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마존닷컴의 시가 총액이 하늘을 찌르는 상태였지만 사무실을 간소하게 운영하고 있는 것도 랜디 코바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었다.
알고 보니 랜디 코바의 부인은 한국계 미국인이었다. 랜디 코바의 부인은 시애틀에서 자영업을 하는 한국 동포 부모아래서 성장했다. 랜디 코바는 나중에서야 이씨에게 이런 사실을 털어놓으며 "공과 사가 구분돼야 한다는 생각에서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씨는 랜디 코바에게서 배운 노하우를 삼성몰에 적용해 국내 유수의 쇼핑몰로 성장시켰다. 삼성몰의 성공을 계기로 이씨는 닷컴 CEO로 인정 받게 됐고, 1999년 인터넷 경매업체 옥션 사장으로 자리를 옮겨 국내 1위의 전자상거래 업체로 발전시켰다. 이씨는 지난해 옥션의 스톡옵션을 행사해 30억원의 수익을 얻기도 했다.
이씨는 지금도 랜디 코바와 소식을 주고 받고 있다. 최근 전자결제업체 이니시스 대표이사로 자리를 옮긴 이씨에게 랜디 코바는 "조급하게 결과를 기대하지 말라. 회사의 기반을 단단히 굳히는 일에 주력하면 성과가 나타나기 마련"이라고 조언했다. 랜디 코바도 지난해 아마존닷컴을 그만두고 온라인 비즈니스 컨설팅 업체 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민주기자 m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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