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우울·조울병학회가 20∼59세 주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45%가 경증 이상의 우울증을 호소하고 12.3%가 자살을 생각한다는 놀라운 결과가 드러났다. 가벼운 우울증은 26.5%, 중등도는 13.2%, 심각한 우울증이 4.9%로 치료가 필요한 우울증만 18.1%나 되는 셈이다. 그동안 알려진 중등도 이상 우울증 유병률 7.5%보다 2배 이상 높고 세계 평균 유병률보다도 높은 것이다.반면 병원을 찾는 환자는 전체의 10분의1에 불과하다고 전문의들은 말한다. 전세계적으로 우울증 치료제가 가장 많이 팔리지만 국내에선 환자수가 훨씬 적은 정신병 약물이 더 많이 처방된다. 그만큼 우울증 환자들이 치료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는 뜻이다. 효과적인 치료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병원 문턱을 밟아보지 못한 우울증 환자들은 생업을 포기하고 자살을 기도하는 등 심각한 고통에 빠진다.
우리나라 20대 여성과 30대 남성의 첫번째 사망원인이 자살이라는 점도 우울증과 관련이 깊다. 사회적 손실도 엄청날 수밖에 없다. 우울증 환자를 병원 밖으로 몰아내는 사회적 편견과 무지, 그 5가지 적을 꼽아본다.
"여보. 몸 여기저기 안 아픈 데가 없고, 인생 사는 낙도 없고,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어." 어느 날 부인이 남편에게 심적인 고통을 호소했다. 남편의 답변. "거, 집에서 쓸데 없는 생각 하지말고 생산적인 일이나 좀 해봐."
"소심해서 그래""게을러서 그래""성격도 별나네"등의 반응은 우울증을 성격 탓으로 돌려 원인을 흐릴 뿐 아니라 환자가 스스로를 '결함있는 인간'으로 비하하게 만든다. 가장 의지할만한 상대로부터 이런 말을 들으면 환자는 더욱 궁지에 몰린다. 분당서울대병원 정신과 하규섭 교수는 "우울증이란 건강한 사람이 감기에 걸리듯 활달한 사람도 걸릴 수 있는 질병일 뿐"이라며 "우울증을 성격 탓으로 몰아선 안 된다"고 말한다. 소심하거나 내성적인 성격은 우울증의 원인이라기보다 오히려 결과라는 것. 다만 완벽주의적인 성격, 남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성격이 우울증과 약간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초등학교 3,2학년 연년생 남매를 둔 주부 A씨는 아내와 엄마 역할에다, 몇 년 전부터는 생활설계사라는 직업까지 가져 '슈퍼 우먼'처럼 살았다. 매일 아침 밥을 해 먹고 남편의 셔츠를 다려 입혔으며 아이들 학교행사에도 빠지지 않았다. 저녁에 회사에서 돌아온 뒤엔 반찬준비와 빨래를 해치웠다.
그러다 1년 전부터 A씨는 여기저기가 아프기 시작했다. 감기처럼 온몸이 쑤시고 만성 두통에 시달리다가 위염과 십이지장궤양이 겹쳤다. 늘 다리, 허리가 아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양치질을 할 때면 구역질에 시달렸다. A씨는 내과, 통증클리닉 등을 전전했고 소화제, 영양제, 진통제, 수면제를 섭렵했다. 한 친구가 신경정신과에서 치료를 받고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A씨는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다"고만 여겼다.
우울증은 우울하고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심리적 변화와 함께 피곤하거나 잠을 못자는 등의 신체적 증상으로 나타난다. 정작 그에 대한 치료는 효과가 없어 한의원 영양제 등을 전전하기도 한다. 정신과에 대한 편견이 심해 기피하는 면도 많다.
병원 갈 돈 1만원을 꾸러 다니던 주부가 세 아이와 함께 세상을 버렸다. 장애인 아들을 둔 교사는 아들을 목졸라 죽인 뒤 자살을 기도했다. 대기업 과장 출신이었던 한 남성은 명예퇴직후 자살했다.
가톨릭대 성모병원 정신과 채정호 교수는 "이런 자살사건을 보면 흔히 생활고나 신병비관이 문제라고 말하지만 똑 같은 상황을 그럭저럭 극복해내는 사람도 많다"고 말한다. 자살의 70∼80%가 정신과 질병과 관련돼 있고 이중 70∼80%가 우울증이라는 것은 학계의 정설. 채 교수는 "사회적으로 카드빚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기 앞서 우울증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한다면 훨씬 더 많은 이들을 자살의 구렁텅이에서 구할 것"이라고 말한다.
즉 외부의 스트레스요인이 악화 원인 중 하나이나 우울증은 뇌에서 신경전달물질의 기능장애로 인한 병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가벼운 우울증이라면 환경적 요인을 없애고 자기최면을 거는 인지적 방법으로 호전될 수 있다. 그러나 자살을 생각할 정도라면 의사가 필요하다. 약물치료를 받으면 탈출구가 보이지 않던 일도 '감당할만한 일'로 바뀔 수 있다.
48세의 여성 B씨가 처음 우울증세를 보인 것은 병원을 찾기 12년 전 유학시절이었다. 우울해지고 화가 나고 죽고 싶다고 생각하던 그는 교통사고를 당한 뒤 귀국했다. 이후 B씨는 우울증상이 심해지다가 나아지는 시기를 반복하면서 만성 우울에 빠져들었다. 최근 증상이 다시 나빠지며 술 담배를 과용하고 자살기도를 하기에 이르러 비로소 병원을 찾게 됐다. 하 교수는 "우울증에는 골과 마루가 있어 병원을 찾지 않아 치료가 더욱 어렵다"고 말한다. 조기에 치료받지 않고 만성화하면 재발의 올가미에서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울증은 6개월 이내 25%, 2년 내 30∼50%, 5년 내 50∼75%가 재발한다.
뭔가 문제가 있음을 스스로 인지한 뒤에도 다른 해결책을 찾는 경우가 흔하다. "술 한잔 먹고 풀자"거나 종교에 몰두하는 경향도 있고 점집을 찾아다니다가 굿을 하는 경우도 있다.
하느님의 목소리나 알코올은 우울증을 일시적으로 잊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치료는 해주지 않아 더 큰 문제로 돌아온다. 여의도성모병원 정신과 김광수 교수는 "우울증은 의지나 심리, 영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명백히 인식해야 한다"며 "마음에 걸린 감기라고 여기고 전문의를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희원기자 h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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