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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에선]대관령 어흘리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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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에선]대관령 어흘리 사람들

입력
2003.11.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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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바다를 향해 대륙을 건너 온 바람이 마지막으로 부딪쳐 솟구치는 곳. 대관령이다. 그 기세로 아흔아홉 구빗길을 샅샅이 훑어 내린 바람은 고개 아래 첫 동네, 어흘리에서 무르춤한다. 그래서 강원 강릉시 성산면 어흘리는 '바람 잘 날 없는' 마을인데, 큰 바람이 하루종일 몰아쳤던 지난 달 28일에도 마을의 키 작은 집들은 바람을 등진 채 웅크려 앉아 있었다. 마을이 품을 연 자리에는 퀭한 도로가 지난다. 456번 지방도 표지판을 단 그 길이 2년 전만해도 진종일 영동과 비(非)영동의 차들이 꼬리를 물고 교통(交通)하던, 구 영동고속도로다. 가을 대관령의 어흘리는, 잊혀진 옛 도로와 함께 이래 저래 스산했다.2001년 말 대관령 허리를 일곱 군데나 뚫으며 새 고속도로가 열리기 전까지 마을은 구 고속도로의 기(종)점이었다. 도라꾸(트럭) 한 대 빠듯이 지나던 비포장 구빗길이 길을 넓혀 군사도로가 되더니 왕복 3차선의 번듯한 고속도로로 개통된 게 1975년 일이다. 그로부터 30년 세월이 어흘리의 전성기인데, 주민들은 그 때를 '살맛 나던 시절'로 기억하고 있다. "갑자기 눈이라도 퍼부어 도로가 막히면 귀경 차량들이 마을로 몰려들어 쌀이고 감자고 술이고 간에 동을 내놓곤 했지요." 그 뿐이던가. 피서철이면 꽉 막힌 대관령 고갯길 차 안에서 밤을 지샌 피서객들이 새벽 댓바람부터 식당 문을 두드려 허기진 배를 채우며 부산을 떨었는데, 그 때는 그게 성가실 지경이었다고 이장 오상국(54)씨는 회고했다. "옥수수며 감자며 수확한 농산물을 지고 나와 길 가에서 파는 한 철 장사로 한 집서 돈 1,000만원 만지기는 예사였어요."

하지만 공짜 도로가 되면서 겨울 철 제설 비용을 떠맡지 않으려는 당국의 줄다리기 끝에 구 도로는 국도도 아닌 지방도 신세로 전락했다. 이제는 강릉―횡계 새 도로 톨게이트비(1,800원)가 아까운 인근지역 사람들이나, 옛 사랑 흔적을 톺아보듯 일삼아 찾아 드는 여행객이, 가물에 콩 나듯 지나칠 뿐이다. 차량 불빛으로 밤이 낮 같던 동네도 적막강산이어서 길 가 음식점이며 가게는 문을 닫아 건 지 오래였다.

길이 넓어지면 구비의 예각은 둔해진다. 새 고속도로가 대관령과 교감하는 시간과 깊이는 그만큼 짧고 얕아졌다. 따지고 보면 '구 도로'의 구비 역시 옛 사람들이 셈한 '아흔아홉 구빗길'은 아니어서,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구비를 그런대로 유지하고 있는 '대관령 옛 길'이 빛난다. 태백 등줄기 동쪽 바닷가에 사람이 살고, 대관령 너머에도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난 이래 맨 발로 짚신 발로 다져 만든 '옛 길'의 기(종)점 역시 어흘리다. 숱한 관동의 인물과 선비들이 한양을 오가던 길이고, 진부장 대화장 보던 장돌뱅이며 봇짐꾼들이 산적과 호군(虎君)을 피해 소에 길마얹어 넘나들며 고개 이쪽 저쪽의 산물들을 져 나르던 길이다. 그래서 어흘리의 좋았던 시절은 '옛 길'이 난 그 먼 옛적부터 시작됐대도 허풍만은 아닌 셈이겠다. 오랜 세월 파이고 다져진 '옛 길'도 마방(馬房)과 주막의 자취를 지닌 채 발목까지 뒤덮는 오색 낙엽에 조용히 묻혀 있었다.

새 고속도로 계획이 서고 노선이 확정될 때까지 데모는커녕 대책 요구 한 마디 안 꺼낸 사람들이다. 이렇게 될 지 누가 알았으며, 또 누가 귀띔을 했더라도 '설마…'했을 것이라고 했다. "흘러오던 물꼬를 하루아침에 돌려버린 셈이요. 물길이 바뀌니 고인 물에 살던 물고기는 어떻게 되겠소." 그 모진 시간을 견딘 뒤에야 주민들은 살 길을 찾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 물꼬를 열어보자는 것입니다."

시와 머리를 맞대고 지난 9월 개최한 '힐클라임'대회는 대관령 정상(832m)에 이르는 18㎞ 구 도로를 뛰거나 (페달을)저어서 오르는 것이고, 올해 2회째를 맞은 단풍길 걷기대회(10월)는 옛길 지형을 따라 걷고 기어가는 행사다. 속도를 좇아서는 보고 느낄 수 없는, 오직 살을 맞대고 땀을 섞어야만 얻을 수 있는 '대관령의 맛'을 선전하자는 취지다.

그 맛을 먼저 안 이들은 지난 6월 '대관령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대사모)'을 결성했다. 한양서 파견된 원님이 울면서 넘었다가 정이 아쉬워 울면서 돌아 넘었다는 '원울이재'등 옛 길 구비마다 서린 사연과 이름들을 안내표지판으로 세우고, 중턱 옛 주막을 복원해 보자는 구상도 하고 있다. 5월 좋은 날 잡아 강릉출신 작가 이순원이 어린 아들과 사람과 삶의 구비를 얘기하며 걸어 넘던 것(소설 '아들과 함께 걷는 길')처럼 가족 걷기대회를 열어보면 어떨까 생각중이다. 그들의 또 다른 구상 한 토막.

- 구 도로 눈 치워달라고 날마다 사정하지 말고 아예 눈썰매장으로 써보면 어때?

- 좋네. 꼭대기에서 비료포대 하나씩 줘 놓고 엉덩이썰매로 내려오라고 하는 거지.

- 사람을 어떻게 실어 올릴건데?

- 세렉스(농사용 4륜트럭)로 안될라나.

- 택(턱)도 없다. 곤돌라나 모노레일이 좋은데.

- 그 돈이 어디있노. 좀 더 생각해보자.

/강릉=최윤필기자 walden@hk.co.kr

사진 배우한기자

대관령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이세요

올 연말이면 공식 출범하는 '대관령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은 전국 모임을 지향한다. 성산면 출신 시의원과 지역 이장들이 주축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전국의 글 쓰고 사진 찍고 산 타고 여행 다니고 환경 생각하며 대관령과 크고 작은 인연을 맺은 이들이 망라되기를 기대한다.

걷기모임 글모임 사진모임 등 소모임을 두고 연중 대관령 자락에서 문화·체육행사를 벌여보자는 구상인데, 그래서 대관령이 속도에 밀려 잊혀진 고개가 되는 일은 막아보자는 뜻이다. 좋은 사람들이 모여 들면 대관령도 살고, 주민들도 사는 길이 열리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양양 양수발전소 송전탑 244개가 동해 강릉을 지나고, 이 가운데 33개가 성산면 관내 대관령 7부능선을 타고 넘겠다는 모양인데, 이 거대한 국책사업을 어떻게든 막아 서려는 게 이들의 다급한 현안. "아직 출범도 못했는데 할 일은 태산입니다."

바람이 모이는 대관령과 그 바람 아래 어흘리 마을 사람들은, '동양 최고'라는 웅장한 교각 위 새 영동고속도로의 위용을 이고 사는 시절을 맞아, 대관령 옛 길의 사연 많은 구비처럼 아직도 넘어야 할 구비가 아흔아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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