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시드 앗 딘 지음·김호동 역주 사계절 발행·3만2,000원
국내 학술 번역의 기념비적 업적으로 평가 받은 김호동 서울대 교수의 '집사(集史)' 번역 둘째 권 '칭기스칸 기'가 출간됐다. 몽골제국이 14세기 초에 남긴 최초의 세계사 '집사' 1부 1권이 지난해 '부족지'란 이름으로 선보였을 때의 평가대로 이 작업은 아시아 최초, 세계에서도 러시아와 미국에 이어 세 번째 페르시아어 원전 번역이다.
하지만 '부족지'는 김 교수가 밝혔듯 "몽골제국사를 연구하는 전문가가 아니라면 페이지를 넘기기 힘들 정도로 빡빡한 내용이고, 일반 독자들은 그것을 읽는다고 해도 시간 흐름에 따라 사건의 추이를 파악하기가 무척 어려운" 책이다. '집사'에 등장하는 무수한 인물을 그들이 속한 씨족과 부족별로 나누어 서술한, 이를 테면 족보를 겸한 인명록이기 때문이다.
'집사'의 후속 번역을 고대하면서도 '부족지'의 생경하고 복잡한 인물 이야기에 부담을 느꼈던 독자라면 이번에는 좀 안심해도 될 듯 싶다. 본격적인 몽골제국사이며 '집사'의 진면목을 드러내주는 '칭기스칸 기'는 다양한 일화와 문학적 표현이 곁들여져 읽기 수월하고 곳곳에서 역사를 훑어나가는 재미를 발견할 수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칭기스칸 조상들의 사적과 계보, 칭기스칸 자신의 일대기, 그가 남긴 어록 등을 정리함으로써 몽골 제국 건설의 전 과정을 포괄적으로 서술했다. 칭기스칸 사후 100년 여의 세월이 흐른 뒤 일칸제국(이란) 가잔 칸의 지시로 '집사'를 쓴 재상 라시드 앗 딘은 책의 핵심인 칭기스칸의 일대기를 크게 여섯 시기로 구분해 각 시기마다 세계 각지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를 덧붙였다.
제국의 주변인 중앙아시아는 물론 서아시아와 이집트, 중국에서 어떤 왕조의 누가 통치했으며 당시 그 지역에서 어떤 사건들이 있었는지를 기술하는 방식이다. 1155년 칭기스칸이 태어났을 때 바그다드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는 무크타피였다거나, 1158년부터 2년 동안 바그다드가 물에 잠겨 대부분의 길거리며 집이 파괴됐다는 사실을 밝히는 식이다. '집사'를 세계사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책에는 역사 편찬의 공을 알라신의 성력(聖力)에 돌리는 대목이 곳곳에 멋들어지게 등장하고, 견해가 엇갈리는 경우 다른 주장까지 함께 소개하는 이슬람 역사서 편찬의 특징이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실현되기 힘든 큰 희망을 품지만, 그 희망은 갑자기 한꺼번에 무너지고 깨져버린다. 오! 지고하신 신께서는 또 실의에 빠진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기적을 행하시어 그들을 드높고 찬양 받는 지위에 올려놓는가.' 원전의 단어며 문장마다 종교적이고도 문학적인 뉘앙스가 풍부하다. 띄엄띄엄 등장하는 2행의 짧은 시들은 사건이나 역사적 상황에 깊은 여운을 부여한다. 게다가 그것을 옮겨 놓은 우리말은 매끄럽다 못해 청산유수라고 할 정도로 완성도가 높다.
'칭기스칸 기'의 1편 '열조기'에는 신화적 요소도 등장한다. 칭기스칸 종족의 족모(族母)로 9대조에 해당하는 알란 코아는 혼인이나 교합도 없이 순결한 배에서 세 명의 총명한 아이를 낳았다고 기록한 대목이다. 하지만 라시드 앗 딘은 이 대목을 '몽골인들의 주장에 따르면'으로 시작해 기록자의 면모를 잃지 않고 있다. 알려진 대로 1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30세가 다 될 때까지 고난 속에 살다가 몽골제국을 건설하게 되는 칭기스칸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는 이 '칭기스칸 기'만큼 자세하고 분명한 자료가 없다고 해야할 것이다. 후속으로 나올 3권 '칭기스칸의 후계자들'은 내년 가을 출간 예정이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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