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과거의 문제로 불행해지는 기업과 기업인이 없도록, 제가 마지막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2월 취임이후 9개월만에 중도하차한 전국경제인연합회 손길승(사진)회장은 30일 과거의 잘못된 정경유착관행의 고리를 끊는데, 자신이 밀알이 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남기고 재계수장의 자리를 내놓았다. 역대 최단임기 기록이다.
1965년 당시 중소기업에 불과했던 선경직물의 신입사원으로 출발, 재계3위의 그룹회장과 전경련회장에 오른 손 회장은 그동안 한국을 대표하는 전문경영인으로 평가 받아왔지만, 끝내는 불행한 정치자금의 덫에 걸려 날개가 꺾인 비운의 주인공이 됐다. 연초 삼성, LG 등 실세 회장들의 고사로 우여곡절끝에 전경련 회장에 취임했던 손 회장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한중일 동북아경제협력추진체 구상 등 국가적 어젠다를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또 전경련과 기업이 국민의 사랑을 받도록 거듭나기 위해서는 가진 자들이 먼저 베풀어야 한다는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제창하기도 했지만, 결실을 보지 못하게 됐다.
손 회장은 SK그룹의 2대회장인 고 최종현 회장과 함께 맨손으로 SK의 성장을 이끌어온 주역으로 꼽힌다. 65년 당시 대학(서울상대) 졸업동기인 이순석 전(주)선경부회장의 권유로 최회장을 만난 것을 계기로 37년여년간 그룹의 성장을 주도한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80년 구 유공(현 SK(주))인수, 92년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 인수 등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면서 10년단위로 SK의 사업구조를 과거 섬유업체에서 에너지화학, 정보통신업체로 환골탈태시켰다. 한국이동통신 인수당시 재계에서는 SK가 시가를 훨씬 웃도는 가격인 주당 33만5,000원에 인수한 것에 대해 "너무 비싸게 샀다"며, 그룹이 곧 망할 것이라는 루머가 나돌기도 했다. 손 회장은 이에 개의치 않고 인수를 추진, 결국 황금알을 낳은 거위로 성장시켰다.
하지만 손 회장은 재계수장으로서 정경유착의 관행을 끊어야 할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 정치권에 수백억원의 '검은돈'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도덕적인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는 비자금문제등으로 검찰조사를 받는 와중에서 SK(주)의 신임팀장과 과장교육에 참석,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분식회계와 불법 정치자금은 개발세대의 나쁜 관행이었다. 그러나 알면서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모든 과거의 문제를 후배들에게 결코 물려주지 않겠다."
/이의춘기자 e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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