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빈번하게 접하는 소식 중 하나는 총기 사건이다. 1999년 컬럼바인 고교 사건이나 지난해 스나이퍼 사건을 들지 않더라도 학교와 직장, 거리에서 벌어지는 총기 사건은 심심치 않게 미 언론의 뉴스를 장식한다. 헌법으로 총기 소유권을 보장하고 있는 나라, 국민 1명 꼴로 총기 1정을 가진 미국에서 총격사건은 사회적 홍역처럼 여겨지고 있다.선거철만 되면 총기규제를 둘러싼 논란이 불거지는 것도 미국의 오랜 전통이다. 민주당은 특히 선거 때마다 총기 소지 반대론의 목소리를 키워 왔다. 2000년 대선 때 민주당의 앨 고어 후보가 소총 신규 소지자의 등록 의무를 주요공약으로 내건 것은 총기옹호 단체의 지지를 받고 있던 조지 W 부시 후보와의 차별화를 노린 전략이었다.
하지만 2004년 대선을 위한 예비선거전이 한창인 민주당의 분위기는 이전과는 영 딴 판이다. 부시 대통령을 꺾겠다고 벼르는 민주당의 후보 누구도 총기 문제를 정면으로 꺼내기를 주저하고 있다. 오히려 총기옹호단체의 편에 서는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예비선거 초반 선두권을 달리고 있는 하워드 딘 후보는 전국총기협회(NRA)가 자신을 버몬트 주지사로 밀었던 인연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다. 오랫동안 총기 규제 옹호론자였던 리처드 게파트 하원의원도 총기 소유 등록 의무에 대한 그의 과거 주장을 부각하는 데 조심스러워 하고 있다.
민주당 후보들이 총기 문제에서 몸을 사리는 이유는 지난 대선 때의 '고어 악몽'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고어 후보가 자신의 고향인 테네시 주에서 패배한 결정적 원인은 총기옹호단체의 영향력을 간과한 데 있다는 게 선거 복기의 결과이다.
내년 대선의 접전지로 꼽히는 오하이오, 펜실베이니아, 뉴멕시코 주에 총기를 소지한 노조원이 많다는 최근의 조사결과는 민주당 후보들을 더욱 압박하고 있다. 총기 반대 이미지를 불식하지 않을 경우 전통적으로 민주당 지지성향을 보여온 이 지역 노조원들이 돌아설 수 있다는 게 대선 예비 주자들의 고민이다. '건맨(Gun man)'이 정치를 포위하고 있는 나라가 미국이다.
김 승 일 워싱턴특파원 ksi810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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