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고교 동창들과 술잔을 기울였다. 모두가 30대 중반, 물불을 가리지 않고 직장일에 보람을 찾을 연배다. 그런데 이런 기대와는 달리 하나같이 풀이 죽어 있었다. "사오정 알아? 45세 정년 말이야" "너 아직 새 버전을 모르는구나. 요즘은 삼오정이야. 35세면 나갈 준비를 해야 돼."한참 일할 나이인 30대에게서도 패기와 도전정신을 찾기란 쉽지 않다. 최근 어느 TV 홈쇼핑업체가 내놓은 이민 상품에 직장인들이 구름처럼 몰렸다고 한다. 이 가운데 30대가 51%였다. 40, 50대가 대부분을 차지하던 생계형 이민이 이제는 30대의 도피형 이민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나 역시 이민 상품 광고를 보면 솔깃해진다. 샐러리맨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집값, 어렵게 직장을 구해도 시시각각 죄어오는 해고의 불안, 넘쳐나는 비정규직, 로또복권이 생활의 유일한 탈출구로 받아들여지는 사회에서 우리는 희망을 잃어가고 있다.
그렇지만 생각해보자. 이민을 떠나는 것만이 능사인가. 이민을 떠나면 개인의 삶은 편해질지도 모른다. 한국에서처럼 직장 때문에 개인 생활을 희생하지 않아도 되고, 집 한 채 장만하느라 평생을 아끼고 살지 않아도 될 것이다. 직장 일을 마치고 가족끼리 오붓하게 외식을 하고, 주말이면 여행을 떠나는 인간적 삶을 즐기게 될 지도 모른다. 해고의 위협에 시달리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것이 전부일까. 30대는 역사나 사회 발전 같은 거대 담론을 고민하던 시기가 있었다. 나를 희생하고 이웃의 고통을 함께 할 용기도 있었다. 흐릿한 등불 아래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야학을 하면서도 학생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볼 때 얼마나 가슴 뿌듯한 감동을 느꼈던가.
개인적 가치가 가장 우선시되는 요즘 분위기에서 사회와 역사를 위해 나를 희생하자고 주장하면 "어느 시대 이야기를 하느냐"고 손가락질 받을 것이다. 그렇지만 30대가 패배감과 자기 도피에 빠지는 사회는 미래가 없다. 지금의 젊은 세대가 힘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절망하기엔 이르다. 난관을 피하기보다는 문제를 해결하는 법을 생각하자. 지금 이 시간에도 사회는 변화, 발전하고 있다.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젊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30년 후 우리의 자녀들이 떠나고 싶지 않은 나라를 만들어 갈 주체는 우리 30대가 아니겠는가.
김 길 종 이스턴영어 교육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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