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부터 '언론보기' 필자가 주동황 광운대 교수에서 손병우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로 바뀌었습니다. 손 교수는 서울대 신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TV를 읽읍시다' '대중매체의 이해와 활용'(공저) '문화·일상·대중'(공저) '풍자바깥의 즐거움' 등의 저서를 냈습니다.
열린 사회로 가는 길에 토론은 필수라고 할 수 있다. 사회는 늘 변하고 있고 사람들 생각은 각양각색이니 당연한 일이다. 토론 방향을 올바로 안내하고, 판단 근거가 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언론의 구실은 그래서 열린 사회로 가면서 더욱 더 커진다. 10월의 후반기를 뜨겁게 달군 이슈는 스와핑(배우자 교환 성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그전 같으면 "스와핑이 뭐지?"하고 물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텐데, 이제 스와핑은 젊은 대학생들 사이에서도 가장 익숙한 단어 가운데 하나가 됐다. 10월 보름 동안 언론이 떠들어준 데 따른 교육 효과이다.
10월14일 수사발표가 있자 스와핑을 주요 기사로 다루는 데 매체 간 차이가 없었다. 일간지와 방송은 물론이고, 스포츠신문과 시사주간지, 여성월간지에 이르기까지 한 마디로 '얘깃거리가 되는 소재'로 스와핑이 딱 걸린 셈이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기사 논조는 스와핑에 대한 호기심―당혹감―분노 표출로 이어지는 1차적 반응에 가까운 것들이었다. MBC '아주 특별한 아침'에서 제법 오랜 시간 보여준, 경찰과 함께 찍었다는 장면이나 조선일보 등이 기사와 함께 실은 속옷바람의 남녀 사진 등은 몰래 카메라성 장면으로 표면상의 논조와 정반대 효과를 낳을 위험성을 갖고 있는 것들이었다. 마치 "어머 망측해!" 하고 손으로 눈을 가리는 척하면서, 손가락 사이로 볼 건 다 보는 오래 전 코미디의 한 장면처럼 말이다.
특집으로 기획한 중앙일보나 주간동아, 주간조선 등의 논조는 표면상으로는 대단히 강도 높은 비판으로 채워져 있었다. '파괴' '독버섯' '절망' 등과 같은 감정적 수식어를 수시로 사용한다든지, 근친상간이나 난교, 성도착증 등과 연결짓는 극단적 문맥화가 반복적으로 시도됐다. 우리사회의 성 문란을 긴급 연재로 짚은 한국일보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이런 일차적 흥분에 뒤이은 차분한 진단과 해설은 첫 보도가 나가고 보름이 지난 지금까지도 눈에 띄지 않는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첫째, 경찰 수사는 정당한 것이었나? 즉, 성인들의 사생활은 수사 대상인가와 몰래 카메라를 사용한 수사는 정당한 것이었나에 대한 것이다. 이런 점은 연합뉴스가 착실하게 기사화했고, 일부 신문이 그것을 받아서 보도했을 따름이다.
둘째, 보수주의 담론과 자유주의 가치관 사이의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핵심적 쟁점을 끌어내고 있는가? 이는 온라인 신문인 오마이뉴스가 쟁점화를 시도했고, 딴지일보에서 '성의 자기 결정 한계'라는 본질 규정을 시도했다.
셋째, 스와핑은 정신병적 행태인가 아닌가? 이와 관련해 중앙일보는 "치료가 필요한 변태가 아니다"라고 한 반면, 스포츠조선에서는 "노이로제 환자와 같은 수준", 주간동아에서는 "집단 히스테리"에 비유했다. 이렇게 전문가들의 관점이 상반된다면 이제 원론적 추론보다는 구체적인 정신과적 케이스로 얘기해야 할 시점이 됐다.
넷째, 이번 일을 계기로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일부일처제에 대한 논의는 아직 우리 사회에서 불가능할까? 혹은 일부일처제의 역사와 같은 교양 공부라도 하게 된다면 좀 더 생산적이지 않을까?
스와핑에 대한 보도를 보면서, 더 큰 문제는 언론의 센세이셔널리즘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이번처럼 흥분 반응에 가까운 보도는 정보의 '생산'이 아니라 이슈의 '소비'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스와핑에 대한 이해는 없이, 그 용어와 행태의 인지도만 빠르게 끌어올려 저질 업자들에게 좋은 장사 소재만 만들어준 꼴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하게 된다.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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