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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국가의 존재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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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국가의 존재의미

입력
2003.10.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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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도술씨 뇌물수수, 현대와 SK 비자금 파문, 노무현 대통령 재신임과 이라크 추가파병 문제 등 굵직한 정치적 사건들에 파묻혀 언론과 정치권, 국민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사건이 있다.1942년 16세의 나이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가 58년 만인 2000년 5월 중국에서 영구 귀국하여 한국국적을 취득한 이옥선 할머니가 지난 13일 기자회견을 갖고 일제 강제연행 피해자 국적 포기서를 올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 기념일에 맞춰 유엔인권위에 제출하겠다고 한 것이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새삼 '국가의 존재의미'를 생각케 한다. 일제는 한국 각지에서 17∼20세 처녀 10만명 이상을 강제로 끌어 모아 전장의 일본군 위안부로 만들어 버렸다. 이런 역사를 증언하고자 고국에 돌아온 그들을 정부가 포기, 배반한 것이다. 정부가 나서서 일본에 사죄와 배상을 요구해도 부족할 판에,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의 주장을 정부가 외면해 결국 국적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일제에 의한 군위안부 강제동원은 나치의 유대인 집단학살에 못지않은 만행으로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송두리째 짓밟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노 대통령은 지난 6월 굳이 현충일에 일본을 방문하여 과거사를 직시하는 것을 회피하였다.

한일관계를 더 이상 과거의 틀에 묶어두지 말자는 주장도 옳고, 미래지향적 협력관계도 좋다. 그러나 과거는 과거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는 바로 현재이며 미래로 이어지는 것이다. 과거를 덮으면 미래 또한 없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우리 국민들이 광복 이후 세대인 노 대통령에게 바란 것은 대일, 대미 관계에서 노무현식 당당함이었다. 그런데도 노 대통령은 꽃다운 한국여성들이 일본군의 성노리개감으로 전락한 것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못했다. 그의 역사인식 자체에 회의를 품지 않을 수 없다.

강자의 용서는 관용이지만, 약자의 용서는 비굴이라는 것을 정부는 아는가. 이스라엘이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유야무야 넘긴 적이 있던가! 지금의 대한민국은 천황의 적자(赤子)로서 성전(聖戰)에 벚꽃처럼 흩어지겠다고 선서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나 그 추종자들이 통치하던 시대도 아니고, 미국이나 일본의 원조가 없으면 국민들이 배를 곯아야 하던 시대는 더더욱 아니다. 정치적 정통성이 확보된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로 이어지는 민주주의 대통령의 시대이다. 국민의 억울함과 정당한 분노에는 귀를 막고, 한국이 동북아의 물류중심국가가 된들 그것이 뭐가 그리 중요하며, 국민소득 2만 달러 달성이 뭐 그리 자랑스러운 일이 되겠는가.

매주 수요일 일본군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을 주축으로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수요집회가 열리고 있는데 혹시 정부는 이것이 한일관계를 해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지나 않은지? 아니면 앞으로 몇 년, 길게 보아 10 여 년만 지나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면 문제는 자동적으로 해결된다고 생각하고 있지나 않은지?

그 동안 한국전, 베트남전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의 분쟁지역에서 '사망한 미군유해'를 찾기 위해 전담부서까지 두고 국가적 차원의 지원을 아끼지 않는 미국 정부와 비교해볼 때, 우리 정부의 처사는 무성의의 도를 넘어 아예 무관심이다.

이것은 분명 국력 차이 이상의 그 무엇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 우리는 억울하고 분한 일이지만, 인류의 양심을 짓밟고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는 신야만국가인 미국이 5,000년 단일문화민족임을 자부하는 우리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때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자국민 보호를 등한시하는 정부이니 미국이 우리를 얕보고 노골적으로 파병압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송 병 록 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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