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는 각계의 도움으로 매년 70억∼80억원 정도 모금하다 지난해에는 무려 102억원을 모금하기에 이르렀다. 물품과 현금이 각각 절반씩으로 이 모금액수는 국제기아대책기구 지부로는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세번째 규모다.본부와는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만 종속관계는 아니었다. 때문에 국내 기구가 독립적으로 지원대상을 정하는 등 모금한 금품의 사용처를 결정할 수 있었다. 초기에는 모금액 전액을 해외 기아대책 활동에 사용하다 나중에는 국내의 불우한 이웃돕기에도 일정액을 할당했다.
구호품은 직접 전달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정부나 지방자치 단체에 지원금을 맡기면 정작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돌아가지 않고 중간에 사라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해당국 정부에서 대상지역을 추천해 주면 대책기구는 직원을 현지로 파견해 구호품을 사고 분배하는 일을 직접 하도록 한다. 구호활동에는 또 세계 15∼16개국에 파견된 기아봉사단인 헝거코(hunger corps)도 한몫하고 있다. 이들은 대책기구에서 구호활동과 관련된 사업비만 받고 해외에서 최소 3년을 일하게 되는데 생활비는 자신이 소속된 교회나 단체를 지원받거나 자신이 직접 조달하고 있다. 어려운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50명 정도가 활동하고 있다.
대책기구가 국제승인을 받은 이듬해 나는 에티오피아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구호품을 싣고 우리가 찾아간 곳은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 한참을 들어가는 시골이었다. 길가에는 전쟁(내전)의 참상을 말해주듯 고장난 전차들이 널브러져 있고 들판은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구호품을 실은 트럭이 마을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드는데 차마 눈뜨고는 못 볼 광경이었다. 하나같이 광대뼈와 커다란 눈동자만 남은 얼굴에다 앙상하게 드러난 팔다리의 뼈는 마치 몸뚱이에 나무꼬챙이를 끼워 놓은 듯했다. 아이들은 더욱 비참해 불룩하게 튀어나온 배와 온몸에서 고름이 흘러 성한 구석이 없었다. 우리는 싣고간 말콩을 차례로 나눠줬다. 8집에 100㎏짜리 한 포대를 나눠줬는데 보통 8∼10명이 한 식구인지라 한 달가량 먹을 양식이 된다고 했다.
나는 에티오피아의 자연환경도 눈여겨 봤는데 산의 나무를 모두 베어서 나무를 전혀 볼 수가 없었다. 전국토를 농지화한다면서 산을 깎았다는 설명을 들었는데 그런 정책으로 한발과 홍수만 불렀다는 불평도 뒤따랐다. 이런 사정은 북한과 비슷했는데 지난해 내가 북한을 방문했 때도 똑 같은 광경을 목격했고 같은 설명을 들은 적이 있다. 인민들과 함께 공동생산 공동분배를 한다는 나라들이 어떻게 똑같이 어이없는 정책으로 인민들을 도탄에 빠뜨릴 수 있나 하는 생각에 착잡함을 금할 수 없었다.
에티오피아의 호텔에서 우연히 북한사람을 만났다. 우리는 반가운 김에 '안녕하세요'라고 먼저 말을 붙여보았지만 그들은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나중에는 우리 일행이 지나가면 "같은 민족끼리도 살기 힘든 데, 무슨 외국을 도운다고 난리야"라는 빈정거림의 말을 들으라는 듯이 일부러 내뱉기도 했다. 자존심이 강해 좀처럼 가난한 티를 드러내지 않는 그들도 우리 활동에 부러운 시샘을 한다고 넘기고 말았다.
1993년에는 몽골로 구호활동을 다녀왔다. 폭설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몽골정부에서 원조를 요청해와 지원을 하게 된 것인데 중국에서 쌀 3,000포대를 사서 몽골을 찾았다. 같은 몽고반점을 가진 한국에서 보내는 정성이라 그런지 최고의 환대를 받았다. 에티오피아 같은 참상은 아니었지만 많은 주민들이 나와 구호품을 받아갔다.
이외에도 대책기구는 세계 곳곳에서 지원활동을 벌였는데 케냐와 소말리아 등 아프리카 국가들이 대부분이었다. 1991년 중국에서 대홍수가 났을 때도 대책기구는 식빵과 라면 등 구호물자를 대대적으로 실어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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