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들어 과거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일본 정치인들의 발언이 잇따라 불안을 던져주고 있다.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쿄(東京)도 지사는 22일 밤 강연에서 일본에 의한 한반도 식민지 지배가 무력침범이 아니고 조선인의 총의에 의한 선택이었으며 인간적인 것이었다는 취지의 주장을 폈다. 이는 6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일본 국빈방문 직전 아소 타로(麻生太郞) 당시 자민당 정조회장(현 총무성 장관)이 "창시개명은 조선인이 원해서 시작된 것"이라고 주장한 것과, 7월 에토 다카미(江藤隆美) 전 총무청 장관이 "일한병합은 양국이 조인하고 국제연맹이 승인한 것으로 식민지 지배가 아니다"라고 발언한 것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이시하라 지사를 강사로 초청했던 '일본인 납북자를 구하는 모임'의 부회장인 니시오카 츠토무(西岡力) 도쿄기독교대학 교수는 이날 이시하라의 발언에 대해 "독립운동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고 병합이 총의라는 것은 지나친 말"이라고 지적한 것처럼 이 같은 주장들은 역사의 전체상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치인들이 이 같은 망언을 일삼고 있는 것은 최근 일본의 정치·경제·사회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지난해 유사(有事) 법제가 마련되고 지금 한창인 중의원 총선거 유세에서 각 당이 개헌론을 공약으로 내거는 등 일본 정치권에서는 더 이상 과거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론은 찾아보기 어렵다. 또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는 장기불황과 중국의 눈부신 경제성장, 외국인 범죄의 급증 등으로 일본에서는 패전 후 처음으로 내셔널리즘이 다시 태동하고 있다. 지난해 9월 사실로 드러난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사건과 그 뒤의 북한 핵 문제가 여기에 기름을 부었다.
대중정서에 영합하는 선동을 서슴지 않는 일본 정치의 저질화가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북일 교섭을 주도했던 외무성 관료 집에 폭발물이 설치된 사건에 대해 이시하라 지사가 "당해도 싸다"라고 말한 것은 대표적인 예이다. 모리 요시로(森喜朗) 전 총리는 소자(少子)화 문제에 대해 "아이를 낳지 않는 여자에게는 복지혜택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의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 역시 이런 '포퓰리즘적 퍼포먼스'에 속한다.
일본의 이런 퇴행은 한국 정부의 일본문화 추가 개방과 학계의 식민지 근대화론 재조명, 국사해체 운동 등 한국측의 진지한 '열린 민족주의' 의 모색움직임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무엇보다 북핵 문제와 자유무역협정(FTA) 교섭 등 양국간 공동이익을 위한 중대사를 앞둔 상황에서 여전히 휘발성이 높은 역사인식의 갈등을 부추길 위험이 있다.
얼마 전 정계를 은퇴한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전 총리는 "내셔널리즘의 흥륭(興隆)이 시절에 따라 있는 것은 당연하고 바람직할 때도 있지만 건전한 것으로 키워나갈 필요가 있다"고 충고했다. 현재의 일본 정치권을 향한 의미심장한 발언이다.
/도쿄=신윤석특파원 yssh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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