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는 천재성을 증명하는 보증서 같은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귀를 자른 반 고흐의 기행을, 천재 수학자 존 내쉬의 정신분열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천재는 범인에게 없는 광기(狂氣)로 충만하다'(쇼펜하우어)고 하지만 천재의 필요충분조건이 무언지는 모호하다. 천재의 뇌를 기증받아 연구한 사람(신경학자 아놀드 샤이벨)도 있지만 정답은 없다. 그 정의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천재로 불리는 두 남자가 있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열일곱 나이에 한상원 정원영 이적 등으로 구성된 슈퍼밴드 '긱스'에서 베이스를 맡으며 '천재소년'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녔던 정재일(21)과 저주 받은 걸작으로 불리는 영화 '지구를 지켜라'의 감독 장준환(33)이다. 이 두 남자는 6개월째 함께 지내고 있다. 장 감독이 정재일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기 때문. 다음달 중순 발표하는 음반의 뮤직비디오도 장감독이 맡아 촬영을 마친 상태다.천재 천재를 만나다
장준환과 정재일이 만난 것은 지난 5월. 정재일 음반 제작에 지분 참여를 한 차승재 싸이더스 대표가 "재미있는 친구니 다큐를 한 번 찍어보라"며 다리를 놓았다. 두 달 간의 탐색기를 거쳐 7월부터 촬영에 들어갔다. "장 감독님이 생각보다 정상적인 사람이라 다행이었다"고 정재일은 털어놓는다. "정신 나간 사람인 줄 알았어요. '지구를 지켜라'에서 외계인 퇴치한다며 때밀이 수건으로 살갗 벗겨내고 그 위에 물파스를 바르는 장면 있죠? 그거 보면서 괴팍한 천재일 줄 알았어요. 그런데 참 합리적이고 정상적인 분이에요."
"천재?" 장감독은 자신의 치부까지 드러내며 '천재 아님'을 증명하기에 바쁘다. 나름대로 구축했던 천재 이미지는 트로피 분실 사건 이후 와르르 무너졌다는 얘기. "6월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받은 감독상(은게오르기상) 트로피 잃어버린 후 '트로피는 찾았느냐'는 질문을 지겨울 만큼 받았죠" 이렇게 허술한 천재 봤느냐는 말투다. "영화제측에서 트로피 다시 보내준다더니 아직 안 왔어요. 그 나라도 저만큼 정신 없는 나라죠" 그에 비하면 정재일의 반응은 어른스럽다. "이번이 첫 음반인데, 저를 잘 모르면서 천재라고 평가하는 거잖아요. 지금까지의 말은 다 잊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천재 천재를 찍다
벌써 6개월째 촬영하고 있지만 다큐멘터리는 언제 완성될 지 기약이 없다. "'정재일은 이런 사람'이란 걸 보여 줘야 하는데 재일이는 알면 알수록 더 헷갈리고 혼란스러워요. 알 때까지 찍으려구요"라고 장감독은 말한다.
일단 그는 정재일의 타이틀곡이 될 'Mother Universe'의 뮤직 비디오 촬영을 마치고 편집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장감독은 정재일을 찍고 또 그의 음악에 영상을 입히는 작업에 "사실 집착하고 있다"고 말한다. "재일이의 음악은 도대체 어떤 장르다 정의할 수 없을 정도로 새로워요. 어떨 때는 '야, 스팅 목소리다' '어, 핑크 플로이드랑 비슷하네'라는 생각도 들지만 사실 하나도 비슷하지 않다"고 한다. '지구를 지켜라'가 개봉했을 때 SF, 코미디, 스릴러 등 그 어느 장르에도 명확하게 소속되지 못한 채 제작사에서 '범우주적 코믹 납치극'이라는 야릇한 간판을 내걸었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이 새로운 음악에 걸맞은 영상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작업에 몰두하는 이유다. "재일이의 음악에 제가 색다른 영상을 입히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무언가가 나올 것 같다는 욕심이 들어요."
그들의 새로운 음악 그리고 영상
정재일의 앨범에는 10곡 가량이 실릴 예정이다.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프라하 현지에서 녹음한 웅장한 오케스트라 연주에 실려 기존의 가요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애니메이션 '원더풀 데이즈'의 예고편에서 선보인 바 있는 타이틀곡 'Mother Universe'를 비롯, 전곡을 만들고 기타, 드럼, 베이스, 피아노 연주까지 정재일 혼자 해냈다.
이 청년은 "무용 공연을 보고 전시회를 보고 그 감동을 곡으로 쓴다"고 한다. 앨범에는 독일의 현대 무용가 피나 바우쉬의 공연을 보고 감동을 받아 써 내려간 곡도 실린다. "새 음반이 나오면 피나 바우쉬에게 꼭 들려 주고 싶다"는 그는 피나 바우쉬와 친분이 있는 어어부프로젝트에게 앨범 전달을 부탁해 놓았다.
장감독은 정재일에게 조언을 건넨다. "자신을 모두 쏟아 부은 작품을 소수의 사람하고만 나누고 싶은 사람은 없어. 좁고 깊게 사랑 받는 것도 좋지만 재일이는 넓고 깊게 사랑 받는 음악을 해라." 좁고 깊게 사랑 받아 온 장준환 감독의 뼈 있는 말이다.
/최지향기자 misty@hk.co.kr
● 정재일은 누구
정재일을 긱스 멤버로 끌어들인 기타리스트 한상원은 정재일을 "타고난 귀와 왕성한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 음악에 대한 이해가 깊고 진지한 큰 그릇감"이라고 말했다. "천재예요. 베이스는 장난으로 치는 거고 기타 피아노 민속 악기 등 못 다루는 악기가 없어요"(이적) "재일이는 눈이 나쁜 나에게 안경 같은 사람이다. 세상을 또렷하게 보게 해 준다"(봄여름가을겨울의 김종진) 등 정재일에 대한 선배 음악가의 칭찬은 끊이지 않는다.
1996년 영화 '나쁜영화'의 OST에 기타와 드럼을 치며 참가했을 때 그의 나이 14세였다. 재즈 아카데미에 다니던 그의 재능을 알아본 한상원은 17세의 정재일을 '긱스'로 영입했다. 그는 중학교 졸업 이후 정규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구정중학 시절 어머니는 "음악을 계속할 거라면 굳이 학교 다니지 않아도 된다"고 먼저 말을 꺼냈다고 한다.
그에게 천재 수식어를 가져다 준 것은 뛰어난 학습력. 수 많은 음반과 공연에서 연주했지만 그를 특정 악기 연주자로 규정하기 어렵다. 11, 12일 열린 창작 타악그룹 '푸리' 공연에서 그는 북을 쳤고 지난 5월 노영심의 콘서트에는 톱을 들고 나와 연주해 관객의 귀를 사로 잡았다. 이적의 '바다를 찾아서'에서 들을 수 있는 현란한 베이스 연주를 비롯, 윤상 정원영 팀 빅마마 이문세 등 수 많은 앨범에도 기타 베이스 드럼 피아노 신서사이저 등 다양한 악기 연주로 참여했다. '무슨 악기든 배우려 하면 하루만에 익힌다' '다룰 줄 아는 악기가 40개가 넘는다'는 등 무성한 소문과 달리 "다룰 줄 아는 악기는 10개 남짓"이라고 그는 말한다. 물론 탬버린, 캐스터네츠 등은 제외하고.
/최지향기자
● 장감독이 찍는 뮤비는
장준환 감독이 찍는 뮤직비디오 'Mother Universe'는 영화 '지구를 지켜라'의 완결편이다. "이제 그만 '지구를 지켜라'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장감독의 소망을 담았다. '지구를 지켜라'에서 병구는 아버지를 사고로 잃고 엄마는 악덕 기업주에 착취당하다 병에 걸리는 등 어릴적 트라우마(정신적 상처) 때문에 자신을 괴롭히는 이들을 모두 외계인이라 생각하고 그들을 처치하려 한다. 하지만 영화 속 병구는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숨을 거둔다.
뮤직비디오 속의 주인공 역시 어린 시절 아버지를 사고로 잃고 고통 속에 사는 음악가다. 하지만 그는 어른으로 자라나 '피의 요정'을 만나 과거로의 여행을 통해 상처를 극복한다. 유리 조각이 빗물을 타고 피가 되어 하늘로 역류 하는 장면은 기존 뮤직 비디오에서 볼 수 없는 강렬한 느낌을 준다.
'플란더스의 개'로 컬트적 감수성을 인정받았지만, 상업적으로도 대성공을 거둔 '살인의 추억'의 봉준호 감독 역시 가수 한영애씨의 뮤직비디오 작업 중이라 뮤직비디오로 벌이는 장준환과 봉준호의 2 라운드 격돌도 흥미롭다. 장감독은 "봉감독과 무엇이든 겹치는 게 내 팔자인가 보다"라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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