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의 독자 방위군 창설을 둘러싼 논란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장기적으로 EU의 안보는 EU 스스로가 맡아야 한다"는 EU측의 주장에 "EU의 독자군 창설은 곧 대서양 양안의 분열로 이어질 것"이라는 미국의 경고가 충돌하고 있다. 독자 방위군인 신속대응군(Rapid Response Force·RRF) 창설과 이를 지휘할 지휘체제 신설을 골자로 하는 EU의 '자주 국방' 노력은 향후 세계 정세에도 큰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왜 독자 군대인가?
EU는 공산권 붕괴 이후 입법, 사법, 행정권 분립과 단일통화권 창설, 회원국 확대 등을 통해 명실공히 거대 단일 국가를 향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앞으로 미국, 중국과 맞설 '글로벌 파워'로의 성장을 꿈꾸는 EU에게 독자적인 군대는 실질적인 국가 구성요소의 마지막 단계이자 세계 무대에서 목소리를 낼 필수 조건이기도 하다.
2000년대 들어 서서히 논의되기 시작한 EU의 독자군 창설 계획이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 계기는 지난 4월 프랑스, 독일, 벨기에, 룩셈부르크의 '미니 방위 정상회담'이었다. 당시 미국의 이라크전 강행에 강하게 반대하던 4개국 정상은 다른 EU 회원국에 "2004년까지 유럽 다국적군 사령부를 설치하자"고 제안했다. 이들은 "나토가 참여하지 않는 군사활동에 유럽 다국적 군사령부가 유럽의 신속대응군을 파견·지휘하며 이를 위해 EU 군비조달청, 사관학교 등을 설치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안은 미국에 반대하는 정치적 수단으로 부각된 측면이 많았고, EU 회원국 전체가 아닌 일부 회원국으로만 다국적군을 구성한다는 점이 "분열을 조장한다"는 지적을 받으며 수그러 들었다.
미-EU 정면충돌
EU의 독자 방위를 둘러싼 양측의 대립은 이번 달 들어 한층 날을 세우고 있다. EU 15개국 정상들이 지난 4일 EU 새 헌법 초안을 12월 중순까지 확정키로 합의함에 따라, 새 헌법의 주요 의제중 하나인 유럽 방위정책 논의가 더욱 급물살을 타게 됐다. 여기에 이탈리아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가 17일 브뤼셀 연례 정상회담에서 "EU 정상들이 만장일치로 유럽방위정책에 합의했다"고 밝혀 논의에 진전이 있었음을 시사했다. 미국은 자신을 제외한 유럽 국가들끼리의 '위험한' 논의가 급진전을 보이자 니콜라스 번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주재 대사를 통해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는 15일 나토 대사간 정례 협의에서 "EU의 독자 방위계획은 대서양 국가간 관계에서 가장 큰 위험이자 나토의 앞날에 심각한 위협"이라며 "EU의 헌법에 명시될 방위정책을 알아야겠다"고 포문을 열었고, 베를루스코니의 발언이 알려지자 나토 긴급회의까지 소집했다.
지난 20일 모인 나토 소속 각국 대사들은 일단 "나토를 해치지 않는다"는 데 합의했지만 불씨는 여전히 남아있는 상태다.
나토의 앞날은
지난 50년간 나토를 매개로 유럽에 영향력을 행사해 온 미국으로선 '유럽만의 군대'가 반가울 리 없다. EU 신속대응군의 등장은 나토의 존재 이유를 흔드는 사건이다. '유럽은 하나인데 지키는 군대는 둘'인 상황이 되기 때문이다.
냉전 종식 이후 주적이었던 소련이 없어진 상황에서 정체성을 고민하던 나토는 마침 테러 방지라는 새로운 환경에 비교적 성공적으로 적응해 왔지만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새로운 복병을 만난 셈이다.
나토는 발빠른 대응에 나섰다. 제임스 존스 나토군 사령관은 지난 15일 독자적인 신속대응군을 창설하며 "육해공·특수군을 단일지휘체제 아래 두고 전세계 분쟁지역에 출동명령후 5일 이내에 파견하겠다"고 밝혔다. 나토의 신속대응군 창설은 당초 계획보다 1년을 앞당긴 것으로 EU 신속대응군에 대한 견제 성격이 짙다. 미국과 EU의 정치적 협상이 앞으로 나토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겠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EU와 나토의 신속대응군 사이에 '능력 경쟁'이 벌어질 가능성도 있다.
영국 변수
당초 신속대응군 창설 계획에 반대했던 영국이 최근 모호한 입장을 취하면서 향후 주요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지난달 베를린에서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와 정상 회담후 "EU는 나토에 의지하지 않는 독자적인 군사작전 수행능력을 가져야 한다"며 유럽 방위협력 강화에 공동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밝혔다. 잭 스트로 외무장관도 이달 초 브뤼셀의 EU 정상회담에서 "유럽의 수호자로서 나토의 존재를 부정하는 행동을 있을 수 없다"는 단서는 달았지만 "EU는 독자 방어능력을 의논할 권리가 있다"고 여운을 남겼다.
미국은 철썩같이 믿어온 맹방 영국의 태도 변화에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콘돌리사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영국 수뇌부의 잇단 유화발언 이후 총리실 외교보좌관에게 전화를 걸어 우려를 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용식기자 jawohl@hk.co.kr
■ EU "독자 방위군" 역사
유럽연합(EU)의 독자군 창설 움직임이 본격화한 것은 냉전 종식 이후부터다.
이전에도 실패로 끝난 유럽방위공동체(EDC) 창설 시도(1954년)와 공동성명 발표 수준에서 흐지부지된 유럽정치협력체(EPC) 창설(1970년) 등 비슷한 노력은 계속됐었다. 그러다 공산주의 몰락 이후 잇따르는 지정학적 격변과 국제 테러리즘 등에 공동 대처하기 위해서는 단일 정치·외교력과 이를 뒷받침할 독자 군사력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유럽 독자군의 실질적 뿌리는 유럽의 정치·경제적 통합의 기본 틀인 '마스트리히트 조약'(1992년)에 따라 출범한 공동외교안보정책(CFSP)이다. 하지만 독자 군사 개입 능력이 없는 CFSP는 몇 달 뒤 발발한 유고 내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해 스스로의 무기력함만 확인하고 만다.
EU는 97년 조인된 암스테르담 조약에 의거해 '공동외교안보정책 고위 대표'라는 직함을 신설하고, 잠재적인 군사 위기 상황을 분석하는 조기 경보기구를 창설하는 등 CFSP 개정 작업에 나섰다.
하지만 CFSP는 99년 코소보 사태로 또다시 한계를 드러냈다. EU는 코소보를 계기로 미국과의 엄청난 군사 격차를 확인하고, 미국이 인명 손실을 우려해 지상군 투입을 주저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우리의 안보를 미국에만 의존할 수 없다"고 깨달은 것이다.
이에 따라 현재의 유럽안보방위정책(ESDP)이 급류를 타게 됐다. 우선 99년 6월 "지역 내 위기 관리 위해 독자 군사력을 보유해야 한다"는 공식 합의에 따라 정치안보위원회, 군사위원회, 군사참모부 등 3대 군사기구 설치에 합의했다.
같은 해 12월엔 독자적인 군사행동 결정 능력과 군사작전 수행 능력을 가진 ESDP 창설을 위한 의장국 보고서가 채택됐다. ESPD는 위기 발생 60일 이내에 독자적인 결정에 따라 최대 6만명의 신속대응군과 최대 5,000명의 경찰 병력을 파병할 수 있도록 하는 등 구체적인 지침을 마련했다.
이후 2000년 3월 3대 군사기구가 설치되고, 같은 해 11월 EU 국방장관회의가 열려 병력 6만 6,000명, 전투기 400대, 함정 100대 등 병력을 확정한데 이어 올 10월 정상회의에서 공동방위협력 강화안이 승인되는 등 독자 방위능력 구축을 위한 절차가 착착 진행되고 있다.
/최문선기자 moonsu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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