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하던 6자 회담이 전환 국면을 맞았다. '선 해체, 후 안전보장'의 틀에서 한치 양보도 하지 않던 부시 미 대통령이 방콕 한미 정상회담에서 6자 회담의 조기 개최에 합의하는 동시에, 다자 틀 안에서 북한의 안전보장을 서면 보장할 뜻이 있음을 비추었다. 이는 매우 긍정적 사태 진전이다.부시의 발언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가소로운 제안이라고 폄하했던 북한 역시 전향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북한 외교부는 부시 대통령의 '서면 불가침 담보' 제안이 '동시행동원칙'에 기초한 일괄 타결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면서, 이를 검토할 용의가 있음을 미국에 통보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법적 구속력을 가진 양자간 불가침 조약'을 고집하던 북한측 입장을 감안할 때, 이는 매우 고무적 현상이다.
내년 대선을 앞둔 부시 행정부로서는 이라크 상황도 어려운 판국에 북핵 사태를 악화시켜 새로운 군사대치 국면을 조성하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클 수 밖에 없다. 그간 신보수주의파의 강공에 밀려 수세에 몰리던 국무부 온건파 입장이 강화된 것도 큰 몫을 했다. 특히 이번 조치는 조건 없이 이라크 파병을 결정한 한국 정부에 대한 화답이라 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북한 역시 다른 대안이 없다. 불가침 조약에 집착해 모처럼 조성된 6자 회담의 판을 깰 수는 없는 일이다. 6자 회담의 실패는 북핵 문제의 유엔 안보리 회부라는 최악의 사태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더구나 9·11 사태 이후 미국의 패권적 일방주의 외교 행태를 고려할 때, 미국과의 양자 합의보다는 중국 러시아 등 북한의 우호 세력이 참여하는 다자 보장이 더욱 매력적일 수 있다.
그러나 아직 낙관적 전망은 금물이다. 북한의 '동시행동원칙' 주장과 미국의 '핵 폐기 진전을 전제로 한 다자간 안전보장' 사이에는 큰 괴리가 있기 때문이다. 설령 6자 회담에서 이 문제가 타결되어 북한이 핵 동결 등 원상복귀 조치를 취한다 해도 극복해야 할 과제는 산적해 있다. 특히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을 포함한 모든 핵 시설에 대한 검증 가능한 사찰과 완전한 핵 폐기에 북한이 어느 정도 협조할지 미지수이다.
이 같은 과제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보다 전향적이고 협력적 외교노력이 있어야 한다. 우선 한 미 중 일 그리고 러시아는 상호 협의 하에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공동의 로드맵을 구축하고 역할 분담에 대한 합의를 도출해야 할 것이다. 유념해야 할 점은 북한의 비협조에 대한 응징도 중요하지만, 협조적 태도에 대한 보상을 구체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안전보장 사안과 더불어 북한 경제와 에너지 문제에 대한 포괄적 유인책이 제시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5자간 정책 공조가 강화되어야 한다.
또한 2차 6자 본 회담에 앞서 예비실무 접촉이 활성화해야 한다. 6개국 대표가 24명의 통역관을 대동하고 2∼3일 동안에 구체적 정책합의를 도출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회담 이전에 6자간에 본격적인 실무 접촉을 통해 사전 합의를 도출해 본 회담에서 수용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보다 신축적인 협상 자세가 요청된다. 6자 틀로서 모든 사안을 협의 결정할 경우, 협상의 구조적 경직성이 높아질 수 밖에 없다. 따라서 6자 틀 안에서 다양한 형태의 대북 양자 접촉을 활성화해 협상의 신축성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연세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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