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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까-한국의 대안운동]책 만드는 농부 황덕명씨와 이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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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까-한국의 대안운동]책 만드는 농부 황덕명씨와 이웃들

입력
2003.10.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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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여는 책 출판사 대표 황덕명(40)씨. 그는 출판인이자 농부이다. 그는 요즘 매일 논에 나가 있다. 이제 벼를 베는 일은 콤바인이 맡고 있지만 작목반원들과 같이 탈곡된 벼를 가마니에 받아주어야 하고 집으로 날라서 말리기도 해야 한다. "추수 끝나면 밭일은 더 있겠지만 11월부터는 책 만드는 일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황씨는 말한다. 그의 출판사 건물은 인천 강화군 양도면 도장2리의 농가주택이다. 세 칸 짜리 집의 방 한 칸은 컴퓨터가 있는 편집실이고, 마루는 편집회의가 열리는 사랑방 구실을 한다. 나머지 방 한 칸은 서고로 쓰고 있다. 마당에는 커다란 평상이 놓여있다. 춥지만 않으면 이곳에서 편집회의가 열린다. 출판사 바로 앞에는 황금 들녘이 펼쳐져 있다. 그 가운데는 그가 청둥오리를 넣어 무농약으로 키우는 논 2,300평도 포함되어 있다. 가족의 살림집은 20분 거리에 있는 아파트이지만 농한기나 편집회의가 있는 때면 그는 이 곳서 지낸다.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는 그는 먼저 이메일을 확인한 후 집으로 간다. 교사인 아내를 차로 출근시킨 후 다시 출판사이자 일터인 농가로 돌아온다. 거기서 개밥과 닭 오리 사료를 주고 작목반원들과 논으로 나간다. 작목반원은 그를 포함, 4명이다. 한 사람은 그보다 젊지만 모두 그에게는 농사를 가르쳐준 선배들이다. 황씨가 강화로 온 것은 1998년, IMF로 출판사가 위기를 맞은 때였다.고려대 사범대를 졸업하고 부천의 야학교사를 하면서 교육전문출판사인 푸른나무의 편집장을 지낸 그는 93년 푸른나무의 출판 방향이 교육에서 벗어나자 교육전문출판사을 직접 차렸다. 내일을 여는 책은 그 후 매년 20종 정도의 교육서를 펴냈다. 출판사 직원도 한때는 7명으로까지 늘어났다. 베스트셀러는 없었지만 꾸준히 사람들이 찾는 책들이라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IMF와 더불어 서적도매상들이 쓰러지면서 그의 출판사도 타격을 입었다. 규모를 줄이다가 결국에는 늘 꿈꿔오던 생활을 실천해야겠다는 데에 생각이 이르렀다. 농부가 되는 것, 농부로서 책을 만드는 것, 지(知)와 체(體), 정신과 육체, 두뇌와 몸이 다같이 활발하게 활동을 하면서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온전한 삶은 생태주의적 미래를 꿈꾸는 이들에게는 가장 바람직한 인간상이었다. 그 역시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던 차에 서울 생활을 접었다.

이 같은 변신에는 그가 만들던 책도 한 몫을 했다. 그는 97년 5월 고병헌 성공회대 교수, 송순재 감리교신학대 교수 등과 더불어 대안교육의 방안을 다각도로 모색하는 격월간지 '처음처럼'을 창간했는데 그 책이 지향하는 삶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농촌에 들어가면 바로 이런 교육관에 입각해서 청소년들에게 노작(勞作)의 즐거움을 가르쳐주는 생활학교를 만들겠다는 계획도 들어있었다. 그는 출판사를 강화로 옮긴 뒤 청소년 누구나 공짜로 묵으면서 농사일을 체험할 수 있는 '도장리 생활학교'도 만들었다.

강원도 홍천 출생인 그는 강화와는 아무런 인연이 없었다. 양평이니 포천이니 경기도의 여러 동네를 훑고 다니다가 아는 사람이 이 곳에 농사 지을 땅이 나왔다길래 들어왔다.

흙은 자애롭다지만 농촌은 아무나 받아들이지 않는다. 농촌 사람들은 자연을 벗삼아 음풍농월(吟風弄月)하겠다는 이들은 반기지 않는다. 그들처럼 묵묵히 일할 줄 아는 사람, 자신을 내세우기보다 이웃을 생각하는 사람을 반긴다. 그리고 그 심사과정은 아주 혹독하다. 사람 됨됨이가 완전히 드러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농촌으로 들어오면서 황씨는 출판에 관해서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다. 격월로 내는 '처음처럼'만은 한 호도 거르지 않았지만 단행본은 1년에 10권 이내로 줄었다. 대신 일하는데 신명을 바쳤다. 볏단을 지는 일, 콩짐을 나르는 일, 새참 운반까지 그는 힘이 필요한 일에는 어디나 등을 들이댔다. 오랜 농꾼들한테 언제든지 배울 생각을 했다. 어른들이 내미는 술잔은 마다하는 법이 없었다. 황씨네 논 바로 이웃에 있는 한영규(70)씨는 38대가 강화에서 살아온 토박이 농부. 그 역시 황씨의 스승이다. 한씨는 "너무 열성이야. 젊은 사람이 농사 잘 짓고 얼마나 착실한지 몰라"하고 황씨를 칭찬한다.

덕분에 그는 작년부터는 논농사도 짓고 있다. 농촌에서 논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진정한 농꾼으로 인정받았다는 의미이다. 지난해 벼를 30가마 정도 냈는데 논주인에게 도지를 내고 500만원 정도 연수입이 생겼다. 이 걸로 먹고 살 수는 있겠지만 교육비와 의료비를 감안하면 생활비는 되지 않는다. 출판사로 돈을 벌까. "농사일에 적응하느라 열심히 하지 못했다"고 말하듯 현재로서는 돈을 벌지 못한다. 아내가 교사가 아니었다면 생활인으로서 독립은 힘든 상황이다.

물론 그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는 많다. 주말체험학교인 도장리 생활학교만 해도 다른 농촌체험프로그램처럼 참가자들한테 2만∼3만원씩을 받는다면 그가 농사일을 해서 버는 돈보다 더 많이 벌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먹을 것을 싸오게 하는 대신 모든 것이 무료이다. "바람직한 삶이 무엇인가를 배우는 농촌체험조차 상품이 되어버려 가난한 아이들은 접할 수 없다는 현실은 말이 안된다. 무엇보다 내가 이 모든 것을 거저 얻었는데…"

도장리 생활학교는 아이들로 하여금 농사일만 체험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풀이나 나무토막으로 곤충만들기를 배우는 공작시간도 있고 별관찰도 한다. 교사들은 도장리의 농부들이다. 그에게 농사를 가르친 도장2리 이장 이동천(46)씨와 유현규(32)씨 등 작목반 동료들이 이들에게 들살이를 가르친다.

이들은 내일을 여는 책에서 새 책이 나오면 나르는 일도 함께 한다. 두 달에 한번씩 '처음처럼'이 나오면 정기구독자를 위해 책을 봉투에 넣고 주소를 쓰고 우체국에 부치는 일을 도맡아준다. 그러면서도 한결같이 하는 말이 "당연히 해야지"이다. "생활학교에서 애들한테 농사를 가르쳤더니 애들이 많이 배웠다며 편지도 보내네. 농사일도 좋은 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라고 말하는 이 이장은 "책에는 발행인만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처럼 책을 부치는 사람도 중요하니까 '처음처럼' 다음호에는 발송인도 넣으라고 했어"라며 껄껄 웃는다.

이런 이웃이 있어서인가. 황씨는 "서울에 살 때는 늘 불안했는데 강화에 오면서 마음이 늘 편안하고 행복하다"고 말한다. 옆에 있던 이웃 농부 안재원(53)씨가 "도시민들은 살기 힘들다고 하지만 우리는 해마다 씨를 뿌리잖아. 씨는 희망이여. 올해 망해도 내년에 또 씨를 뿌리면 또 새 희망으로 1년을 사는 거잖아"라고 말한다.

황씨는 지금 집도 없다. 아파트도 전세이고 출판사 농가나 생활학교 건물이나 모두 남의 집이다. 그가 짓는 땅도 남의 땅이다. 그러나 그는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다고 했다.

서화숙 편집위원 hssuh@hk.co.kr

"유기농 농사로 하늘의 사명 실천" 작목반 동료 김정택목사

황덕명씨의 우리쌀 작목반에는 목사도 있다.

김정택(53·강화군 양도면 도장리·사진)목사는 기독교대한감리회 농촌선교훈련원 소속으로 목회가 아니라 농사일로 하느님의 사역을 다하고 있다. "농사를 지어보면 인간의 힘으로 무얼 한다는 건방진 생각은 절대로 못하게 돼. 하느님한테 기댈 수 밖에 없는 거야. 그러니까 농사는, 그 가운데도 유기농 농사는 하늘의 사명을 실천하는 일이야."

감리교는 이미 10년전부터 교회의 새로운 사명을 생명운동에서 찾겠다며 농촌에서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신앙을 생활 속에서 실천할 목회자를 배출해왔다. 김 목사 역시 이렇게 해서 봉화에서 수련을 받은 뒤 서울에서 가까운 강화에 1996년 농부로 첫발을 디뎠다.

그는 지금 논 2,000평과 밭 1,500평을 친환경적으로 경작하고 있다. "완전 유기농으로 해야 하는데 아직 화학비료는 끊지 못했다"고 아쉬워한다. 그는 이 논밭을 토대로 서울에 있는 이들이 농심을 체득하는 '흙벽돌 생태학교'를 꾸려나가고 있다. 또한 그의 아내 임정숙씨는 농촌 빈곤층 어린이를 유기농 음식으로 자연속에 키우는 유아원을 운영하고 있다.

김 목사가 고무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최근 들어 젊은이들의 귀농이 늘고 있다는 사실. 대개는 자녀의 고질적인 아토피성 피부병이나 성인병을 고치기 위해서 농촌으로 오는 것이긴 하지만 "이 사실이 벌써 도시보다는 농촌이 사람에게 더 살기 좋은 공간임을 확인시켜주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한다. 그는 이들이 흙벽돌집에서 유기농을 통해 치유된다고 들려준다.

"그는 농사를 짓고 살면 먹고 살 걱정은 없지만 날로 높아지는 교육비 의료비 부담 때문에 농민으로 살기를 주저하게 된다"며 "유기농, 소농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농촌에서 살 수 있도록 정부가 교육과 의료에 대한 불안을 덜어주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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