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후반만 해도 해외송금이 자유롭지 못했다. 민간에서는 유학생 학비나 보내는 정도였지 굶주리는 외국인을 위해 송금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때였다. 갖가지 명목으로 모금을 해서 자기잇속을 채우는 사기꾼들도 더러 나올 때였으니 송금을 제한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했는지도 모르겠다.우리가 모은 돈이 큰 액수는 아니었지만 3∼4개월에 한번씩 일본 국제기아대책기구를 통해 본부로 보내려니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송금한도가 제한됐기 때문에 한번 송금을 하려면 몇 장의 서류를 작성한 뒤 일정금액씩 나눠서 보내야 했다. 한번은 내가 은행창구에서 여러 장의 송금서류를 쓰고 있는데 창구 담당인 남자직원이 도움을 주는 바람에 수월하게 일을 처리한 적이 있다. 천주교 신자라는 그 직원은 "좋은 일에는 동참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송금서류를 한 장에 합쳐서 작성하라고 편리를 봐 준 것이다. 그 뒤로는 송금이 훨씬 수월해졌다.
풀무원식품과 한삶회공동체, 동신교회를 중심으로 모금활동을 하는 한편으로 우리나라에도 공식적인 국제기아대책기구를 만들기 위해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본부에 가입의사를 전했다. 그러나 3년 동안 연락이 없다 엉뚱한 곳에서 희소식이 날아왔다. 90년 하와이에서 대책기구 회의가 열렸는데 그 자리에 참석한 윤남중 목사가 대책기구 총재를 설득해 우리나라의 가입승인을 얻어낸 것이다. 일의 순서가 다소 꼬이게 된 것은 대책기구 본부 쪽에서 먼저 눈치채고 나에게 의견을 물어왔다. 한국 지부의 승인요청을 한 것도 내가 먼저고 실제 모금도 내가 먼저 시작했는데 윤 목사에게 허락을 했으니 본부측에서도 다소 미안함을 느낀 것이다. 나는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대외활동에는 윤목사가 뛰어나니 함께 합치도록 합시다"고 답해줬고 이런 우여곡절 끝에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는 탄생했다.
초대 회장은 고 최태섭 한국유리 회장이 맡았다. '유산 안 남기기 운동' 등을 벌이며 국내에서 신망을 받던 기업인이라 적격인 분이셨다. 윤남중 목사는 국제이사를 맡았고 나는 부회장을 맡았다. 그 뒤로 린나이코리아의 강성모 회장이 2대 회장을 지냈고 윤 목사가 3대 회장을 이어받는 동안 나는 부회장직을 고수하고 있다. 사실은 국제승인을 받기 전부터 모금활동을 하면서 조직의 임원진을 모두 구상해 놓았었다. 일이 다소 어긋나면서 당초 계획이 수정될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처럼 기구가 발전한 것을 생각하면 서운한 감정은 추호도 없다.
국제승인을 받고 국내에서도 법인 등록을 해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다소 해프닝이 벌어졌다. 당시까지만 해도 외국에서 돈이 들어와 국내의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경우는 있었지만 해외로 도움을 주겠다며 모금활동을 벌이는 경우는 없었기 때문에 관할이 문제가 된 것이다. 외무부와 보사부가 실랑이를 벌이다 끝내 보사부에서 등록증을 내주는 것으로 결론났다.
국제승인 이후에는 모금활동이 보다 조직적으로 바뀌었다. 일단 최 회장이 나서 기업들의 자선을 이끌어내면서 모금활동이 활력을 얻었고 풀무원식품의 건강레이디들도 더 적극적으로 모금에 동참했다. 당시 건강레이디들은 전철 한번 덜타기, 버스비 줄이기 운동까지 벌여가면서 모금활동에 나서 주었다.
모금활동으로 기억에 남는 것은 미국의 '스즈키 악단'에서 열어준 자선음악회다. 각국 어린이들로 구성된 악단은 실비만 받고 출연에 응해줬는데 호암아트홀에서 3번에 걸쳐 진행된 음악회는 대성황이었다. 홍보와 대회진행에는 풀무원의 건강레이디들이 발벗고 나서 더욱 빛을 발했다. 풀무원식품은 이외에도 사내에서 모금활동을 벌여 대책기구 활동을 도왔다. 지금도 전체 임직원이 해마다 모금활동에 동참하고 있으며 이렇게 모인 돈은 대책기구와 국내의 자선사업에 쓰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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