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교육과정에서 질병을 가르치는 임상강의는 보통 본과 3학년부터 시작된다. 그 전까지는 해부학, 생화학, 생리학, 약리학, 병리학 등 의학의 기초만 배우기 때문에 질병학 강의를 들어야 비로소 의사가 돼 가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나 역시 본과 3학년이던 1970년 1학기 임상강의가 시작되면서 어렴풋하게 알던 질병들을 조금씩 구체적으로 접하게 되었다. 강의에서 배우는 대부분의 질병들은 나와는 큰 관계가 없는 것들이어서 객관적인 입장에서 지식 습득에 열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끔 어떤 질환들은 나와도 관계가 될지 모른다는 일말의 불안감이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특히 폐결핵 강의 때마다 겪는 두려움과 불안은 엄청났다. 당시 폐결핵은 질환의 이환율이나 사망환자수를 볼 때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폐결핵은 발병 초기에는 현저한 증세가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쇠약감, 피로감, 약간의 미열, 잔기침 등등 일반사람이 일상생활에서 흔히 느끼는 막연한 증세 뿐이다. 더구나 영양상태가 충분하지 못하고, 빡빡한 강의 일정에 쫓기는 의과대학생은 폐결핵 증세들을 대부분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강의가 끝난 뒤 나와 내 동기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폐결핵일지도 모른다는 강한 불안감에 빠졌다. 그 후 며칠 동안 방사선과는 학생들의 가슴 X선 촬영 때문에 상당히 분주했다. 결과는 대부분 정상으로 판명됐지만 그 이후에도 질병강의는 나, 아니 우리들에게 공포를 안겨주는 순간들이 많았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나는 질병이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된다는 절박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어느 한 순간도 질병을 잊지 않으면서 살아가야 하는 의사가 질병의 공포 속에서 지내야 되는 것은 참으로 우스운 일이지만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의사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고민 끝에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질병극복의 가장 좋은 방법은 질병의 위험요소를 모두 차단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우리의 삶은 유리관 속에서 음식섭취부터 호흡까지 생활의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통제한 상태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자연의 일부가 아닌가. 질병은 생활과 자연의 부조화에서 온다. 질병은 자신의 생활의 결과일 뿐이다. 질병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생활에 충실해야 한다. 생활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면 질병을 걱정할 이유가 없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질병에 대한 공포가 어느 정도 해소가 되고 비로소 의사가 될 자격이 생긴 느낌이었다. 무엇을 어떻게 하면 가장 자연스러운 생활인가에 대한 해답은 의학이 앞으로 계속 풀어야 할 숙제이지만 폐결핵 강의시간의 그 공포는 내 평생 의사의 길을 열어준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김 광 원 성균관대의대 삼성서울병원 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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