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길에서 띄우는 편지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길에서 띄우는 편지

입력
2003.10.29 00:00
0 0

여행을 취재하는 데에도 바쁜 철과 그렇지 않은 철이 있습니다. 봄이 가장 바쁘고 그 다음이 가을입니다. 여행을 하기에 좋은 계절이라 그렇냐구요? 물론 그렇기도 하지만 보다 큰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자연의 색깔을 쫓아다녀야 하기에 그렇습니다.봄에 따라다니는 색은 꽃색깔입니다. 남쪽에서 시작합니다. 노란 산수유가 지리산 언덕에서 처음 시작합니다. 뒤를 이어 섬진강변에 매화가 핍니다. 매화가 질 때면 벚꽃이 열립니다. 벚꽃과 함께 배꽃, 복사꽃 등 과실의 꽃, 개나리 진달래 등 흔한 꽃도 핍니다.

약간 숨을 멈추었다가 꽃은 산으로 올라갑니다. 철쭉입니다. 붉은 꽃산은 남에서 북으로 달리다가 태백산에서 끝이 납니다. 이미 봄이 가고 여름이 가까이 왔다는 신호입니다. 이렇게 꽃을 찾아 헐레벌떡 뛰다 보면 언제 봄이 갔는지도 모릅니다.

여름은 덜 바쁩니다. 바캉스철인데도 말이죠. 같은 색깔이 오래 갑니다. 6월부터 9월까지 세상은 그냥 초록빛입니다. 조급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겨울도 그렇습니다. 같은 풍경이 짧아도 석 달 이상은 지속됩니다.

봄 다음으로 바쁜 계절은 가을입니다. 우리의 가을은 황금들녘으로 시작됩니다. 뒤를 이어 오색의 단풍이 산꼭대기에서 물듭니다. 단풍이 물들면서 동시에 억새가 꽃을 피웁니다. 억새의 씨앗이 하얗게 날릴 때면 강의 하구나 호수에서 누런 갈대꽃이 보기 좋게 익습니다. 순서대로 차분하게 진행됩니다.

그런데 올해에는 봄보다 가을이 훨씬 바빴습니다. 어떤 이는 "가을이 짧아졌다"고 합니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올 가을은 뒤죽박죽이었습니다. 태풍 매미가 몰아쳤고, 가을 초입까지 9주 연속 주말에 비가 내렸습니다. 가을 가뭄에, 이른 한파에…. 자연이 제정신이 아닌 모양입니다. 아직 북쪽지방에는 추수를 하지 않은 논이 많습니다. 냉해를 입어 여물지 않은 벼를 그냥 세워뒀습니다. 설악산에서 곱게 출발한 단풍은 남하하면서 횟가루를 뒤집어 쓴 것처럼 색깔을 잃어버렸습니다. 아직 물들지도 않은 푸른 잎이 낙엽이 되어 뚝뚝 떨어집니다. 도무지 가을의 모습이 아닙니다. 한 곳에 들러 성과를 얻지 못하면 다른 곳을 찾아야 합니다. 그렇게 올 가을은 허탕을 치느라 더욱 바빴습니다.

화진포에서 갈대를 취재하고 바닷가로 나섰습니다. 바람이 셌습니다. 하얗게 밀려오는 파도와 볼을 때리는 바람에서 냄새가 납니다. 콧속이 찡한 겨울의 냄새입니다.

/권오현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