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란 마치 꿈이나 오색영롱한 비누방울 같다. 찬탄과 환호, 몰입을 부르지만 눈 뜨면 깨는 꿈처럼, 살짝 불면 터져 버리는 비누방울처럼 순식간에 사라진다. 지난해 한국 축구가 월드컵 4강에 올라 '월드컵 4강 신화'라는 말이 돌더니 베트남에 지면서 속절없이 그 신화가 무너지고 있다.신화(Myth)의 그리스어 어원인 '미토스'(Mythos)는 '로고스'(Logos)의 반대편에 있는 말이다. 논리나 이성, 또는 그 언어적 표현인 로고스가 사실(Fact)과 직접적, 단선적으로 관계한다면 미토스는 간접적·복선적으로 관계하고, 대개 종교적 함축이 강하다. 로고스의 반대쪽에는 또 '파토스'(Pathos)도 있다. 로고스가 사상(事象)의 논리적, 이성적 판단인 반면 파토스는 외부 자극에 대한 정서적 반응이다. 이런 점에서 미토스와 파토스는 쌍둥이, 또는 같은 방향으로 달리는 철길의 선로와 같다.
어찌 보면 인류의 역사는 미토스의 지배에서 벗어나 로고스를 찾으려는 긴 행로였다. 신화와 종교, 그에 못지않은 신성 왕권의 지배에서 벗어난 계몽의 시대 이래 역사는 끊임없이 로고스를 향해 달려왔다. 그 로고스의 적자(嫡子)인 과학기술을 추진력으로 문명은 근대 이후 20세기까지 외길을 질주해 왔다. 그러나 스스로의 질주에 눈이 멀면서 과학기술 문명은 그 토대인 이성을 잃었다. 과학기술 문명의 무한한 진보에 대한 환상이 맹신으로 굳어졌을 때 그것은 이미 하나의 신화였다.
그 신화를 깬 것이 1980년대에 세계적 물결을 이룬 환경운동이었다. 과학기술과 산업 발전이 자연의 이용을 넘어 자연 파괴로 치달으면서 싹을 틔운 미래에 대한 불안이 배경이다. 환경운동은 무한한 진보의 환상에 사로잡힌 인류에게 이성을 찾도록 해 주었다. 자연과의 조화가 지속 가능한 문명의 기본 조건임을 과학적으로 일깨웠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찾아 오는 피로 증세, 그럴수록 스스로의 질주에 도취하는 미혹(迷惑), 극으로 치달으면서 빠지게 되는 근본주의적 함정은 환경운동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새만금 간척 사업과 저준위 방사성 폐기물 저장 시설에 애써 동일한 잣대를 적용하려는 굳어진 태도에서 이미 신화화하고 있는 한국의 환경운동을 보게 된다. 새만금 간척 사업에 대한 환경운동단체의 반대는 과학적 설득력이 있다. 우리 강산을 온전한 모습으로 지키자는 정서적 동기를 넘어, 경제적 실리면에서조차 갯벌의 다양한 기능을 근거로 미래의 가치를 논해 왔다.
반면 방사성 폐기물 저장시설에 대한 반대는 관성에 의한 것일 뿐임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다. 원자력 발전소 뒷마당의 흙구덩이에 폐기물이 대책 없이 쌓여가고 있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면 어디 먼 우주에 내다버리면 모를까, 보다 안전한 저장 시설의 필요성을 부인할 수 없다. 더욱이 정말 그렇게 큰 위협이라면 오랫동안 그런 위협에 노출돼 왔고 지금도 그런 원전 주변 주민들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최소한의 과학이요, 이성이다.
신화는 무너진다. 서울 강남의 아파트값은 내리지 않는다는 '강남불패'의 신화도, 환경운동은 무조건 선(善)이라는 신화도. 문제는 영원할 것 같던 '부동산 신화'가 무너지면서 10년 이상 장기 불황에 빠진 일본에서 보듯 급격한 신화의 붕괴는 개인과 사회를 고통스럽게 한다는 점이다. 그런 충격을 완화할 예방약이라고는 자연이 우리에게 부여한 이성으로 신화의 허구를 조금씩 알아내는 것 뿐이다.
황 영 식 문화부장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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