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리는 두 편의 영화에서 은장도를 목격할 수 있었다. '스캔들'의 숙부인이 쥐고 있던 은장도, 그리고 '은장도'(사진)의 민서가 들고 있는 또 하나의 은장도. 두 영화의 맥락은 다르지만, 그녀들의 사용법은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것 같다.은장도는 조선시대 여인들이 정조를 지키기 위해 몸에 지니고 다녔던 호신용 노리개이다. 그리고 사극에선 결정적 장면에 등장하는, 팽팽한 긴장감을 조성하는 소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마님들은 언제나 은장도를 뽑아 들기만 할 뿐 자결하지는 않는다. 제목 자체가 함축적이면서도 강렬한 느낌을 전하는 '마님'이라는 영화를 보자. 참고로 '젖소부인 바람 났네'로 유명한 김인수 감독이 충무로 시절(1987년)에 만든 영화다.
마님(김문희)은 몇 년 째 수절 중이며 열녀문까지 하사 받은 정숙한 여인이다. 그녀는 마음이 심란해질 때마다 절에 찾아가 불심에 호소하지만, 마음 한 구석은 항상 불안하게 흔들린다. 여기, 마님을 사랑하는 머슴(백일섭!)이 있다. 착한 머슴은 그저 마님이 불쌍해 보여서 다정함을 보이지만 마님은 "이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게냐!"라고 소리치며 계급적 권위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쓴다.
에로티시즘 사극의 가장 큰 억압은 여성의 성욕에 대한 억압이었다. 그리고 이른바 '수절 이데올로기'는 그 정점이었다. 조선시대는 과부의 개가를 근본적으로 금지했으며, 재혼하는 과부의 아들은 벼슬길이 막혔다. 반면 열녀문을 하사 받을 경우 경제적 혜택이 주어지기도 했다. 이런 상황은 곧 '은장도 딜레마'를 만들어낸다. 일단 뽑긴 뽑았다. 하지만 정말로 찌를 만한 용기가 있는 것일까? 그녀들은 모두 은장도를 다시 거두고 욕망을 허락한다. 바로 여기에 에로티시즘 사극의 진솔함이 있다.
만약에 80년대 에로 사극이, 마치 사무라이가 할복하듯 퍽퍽 자결하는 수절녀의 모습을 담았다면, 그 영화들은 거짓된 영화로 전락했을 것이다. '마님'에서도 결국 마님과 머슴의 사랑은 이뤄지고 열녀문은 쓰러지고야 만다. 은장도라는 것은 무기가 아니라 계급적 자존심의 상징인 셈인데, 그것은 욕망 앞에서는 한낱 쇠붙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80년대 후반으로 오면 이대근이 머슴으로 나오는 '고금소총' 같은 영화에서 아예 수절 과부를 희화화하기도 하지만, 당대 에로 사극의 진정한 미덕은 '결국은 해방되는 욕망'이었다. 이후 코믹 에로가 기세를 올릴 때도 주제의식은 같았다. 성적 억제는 비극의 씨앗이며, 해방적 성은 즐겁다는 것. 이것이 바로 사극의 소박한 매력이었다.
'박씨전'에는 음욕이 일어날 때마다 엽전을 굴렸더니 나중엔 그 엽전에 무늬가 다 없어졌다고 말하는 한 과부가 등장한다. 결국은 엽전 굴리는 숫자가 줄어들고 성욕마저 사라지더라는 것이다. 그녀의 무조건적 인내는 과연 무엇으로 보상 받았을까? 아마도 그녀는 아무도 보상해줄 수 없는 귀한 것을 잃은 것 같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 누구에게도 그 책임을 물을 수 없다.
/김형석·월간스크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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