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집값 폭등과 맞물려 고교 평준화 해제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 노무현 대통령과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 조순 전 부총리 등 경제원로, 정운찬 서울대 총장 등이 잇따라 평준화 재검토를 요구하면서 이 문제가 다시 사회적 쟁점이 되고있는 것이다. 고교 평준화 정책은 교육적 문제를 넘어 '이념적' 갈등의 소지까지 내포하는 민감한 문제다. 평준화 정책은 피상적으로 보면 교육과정, 학교선택, 대입전형, 학교간 격차해소 등의 교육적인 측면이 강하다. 하지만 정치·사회적 맥락에서 볼 때 정치체제가 지향하는 이념과 사회정의, (교육)기회균등 등의 문제를 함축한다. 따라서 평준화 논의는 자칫 '가진 자' 혹은 '못가진 자'간의 정책논쟁으로 비춰지기도 한다.평준화 실시의 배경과 평가
평준화가 시작된 1973년의 통계를 보자. 당시 정서불안 등 '중3병'에 시달리는 중학생이 27%에 이르고, 서울과 부산의 중학생 중 1만5,000여명이 지방에서 전입한 학생으로 채워졌다. 또 중학생의 91%가 하루 4시간 이상 과외수업을 받는 것으로 조사됐다. 따라서 고교입학시스템의 변화에 대한 사회적 욕구가 상당히 컸다고 추정할 수 있다.
당시 정부는 평준화 정책의 방향으로 중학교육 정상화 학교간 격차해소 과학 및 실업교육 부흥 지역간 교육 균형발전 교육비 부담 경감 학생의 대도시 집중 억제 등을 내걸었다. 실제로 평준화는 중학 교육의 정상화, 과열 과외 완화 및 재수생 해소, 고교간 격차 해소 및 고교 교육기회의 확대, 인성교육 발달 등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평준화는 적지않은 병폐도 있었다. 학생들이 이질 집단으로 구성되면서 수업분위기 저하, 학력 저하, 학생·학부모의 학교선택권 제한, 영재교육 등 수월성(excellency) 교육의 애로 등 문제점이 일선 현장에서 제기됐다. 더욱이 평준화 정책에도 불구하고 사교육(과외)이 근절되지 않자 정부는 80년 과외를 전면 금지하는 '7·30 교육개혁' 조치를 발표했다. 오히려 평준화가 사교육을 부추긴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2003년 현재 전국 12개 시·도, 23개 지역, 총 36개 학군에서 고교 평준화가 실시되고, 전체 일반계 고교의 50.4%, 고교생의 68.2%가 평준화의 테두리 안에 있다.
평준화 폐지논란의 쟁점
'만인을 위한 교육은 누구를 위한 교육도 못된다'는 논리를 앞세운 평준화 폐지 주장과 '교육의 형평성과 기회균등을 확보해야 한다'는 유지 주장이 팽팽하다. 경제단체 등은 평준화 정책이 학력을 저하하고 사교육비를 오히려 증가시킨다고 주장한다. 또 학생과 학부모의 학교선택권을 제한하고 사립학교의 자율성과 학생선발권을 제한, 결과적으로 대중교육을 강조하게 되어 교육의 양적확대에도 불구하고 경쟁력을 점차 상실해왔다는 것. 일각에서는 최근 강남 집값 급등의 원인 중 하나가 분당과 일산 등 수도권 신도시 지역의 평준화 실시 때문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반면 전국교직원노조 등 교육관련 단체에서는 교육의 형평성과 기회균등 차원에서 평준화 제도를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평준화를 폐지할 경우 74년 도입 당시의 중3병, 과열과외, 사교육비 증가, 학생들의 신체적 성장저하 등이 예견된다는 것. 정부의 입장도 이쪽으로 다소 기울어 있다. 즉 평준화 제도의 기본 틀을 유지하면서 특수목적고, 자율학교, 대안학교 등 다양한 교육기관을 통해 제도를 보완하겠다는 계획이다. 또한 학교 교육과정 운영에 자율성을 주고 수준별 교육과정(일종의 우열반) 및 이동식 수업 확대 등을 추진하려 한다.
현재 특수목적고는 115개, 특성화고 69개, 자율학교 65개, 부산국제고 1개, 자립형 사립고 6개가 있는데 평준화를 유지한 상황에서 이를 계속 늘리겠다는 것이 정부의 복안이다. 하지만 특목고가 이미 입시기관으로 전락했다는 주장이 나오는 상황에서 이 같은 교육인적자원부의 대안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더욱이 평준화건 비평준화건 대학입시가 존재하는 한 사교육 기승을 결코 막지 못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우울한 진단이다.
/조재우기자 josus62@hk.co.kr
● 평준화 보완책
고교 평준화 실시로 학력저하나 부동산가격 상승 등의 직·간접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는 지적에 따라 갖가지 보완책이 나오고 있다.
교육인적자원부는 당장 22일 시·도교육청 부교육감 회의에서 특수목적고와 영재학교, 특성화고, 자율학교 등의 설립·지정 확대를 포함한 몇가지 보완방안을 내놓았다. 특목고나 영재학교를 통해 각 부문에서 뛰어난 교육능력을 발휘하는 학생들을 흡수하고 취업에 관심있는 학생들은 특성화고 등으로 분산시키는 등 교육수요에 맞춰 유연하게 대처하자는 것. 또한 수준별 교육의 강화와 학생의 학교선택권을 넓힐 수 있는 선지원 후추첨제 등의 방안도 제시됐다.
평준화가 학교선택권을 제한해 왔다는 측면에서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이명균 연구원은 교육부의 방안을 바람직하다고 평가했다. 이 연구원은 "학생들로부터 학교 선택권을 빼앗은 무작위 추첨이 평준화 문제의 근본원인이었으며 일반 인문계 학교와 일부 실업계 학교에 불과한 선택사양도 문제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유인종 서울시교육감은 다른 보완방안을 들고나왔다. 학년제를 폐지하고 대신 서양식 고교교육 과정인 학점제를 도입하자는 것이다. 필수교과목을 최소화한 다음 필수 교과와 일부 선택교과를 이수하면 졸업이 가능한 대학식 시스템이다. 이미 이동식 수업과 수준별 수업을 7차 교육과정부터 적용하고 있기 때문에 시행에는 별 무리가 없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현재 전국 6개 학교에서 시범운영중인 자립형 사립고도 평준화 보완책으로 거론된다. 당초 전국 30여개 학교에서 시범운영할 계획이었지만 '귀족학교'라는 위화감을 조장할 수 있다는 지적에 따라 최소로 줄었다. 교육당국에서는 2005년까지 운영 성과를 지켜본 다음 확대 여부를 결정한다는 방침이다.
/김정곤기자
● 외국의 경우
외국의 경우 우리와 같은 평준화 체제는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 같은 의견이다. 미국이나 프랑스, 영국, 일본 등 선진국에도 공립학교는 있고 거주지역에 따라 학교를 배치받긴 하지만 우리처럼 선택권이 완전히 제한돼 있지는 않다.
한국교육개발원이 1999년 발간한 '고교 체제 개편에 관한 정책연구'에 따르면 선진 각국의 고교 입시제도는 크게 배정형, 안내형, 선발형 등으로 나누어 진다. 배정형은 말 그대로 가까운 학교로 배정을 받는 우리와 유사한 형태이고 선발형은 학생들이 시험 등으로 학교에 지원하고 학교에서 선발하는 형태다. 안내형은 중간유형으로 학생들이 최종선택을 하지만 학교에서 진로안내를 하는 경우다.
미국과 영국의 경우 공립학교는 우리와 비슷하게 인근 학교로 배정을 시키는 배정형이다. 물론 여기서도 사립학교는 철저히 선발형. 그러나 공립학교도 우리처럼 무작위 추첨을 통해 배정하면서 선택권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다. 한국교육개발원 김정래 연구원은 "보통 인근의 공립학교로 가지만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원거리 학교라도 자원해서 다닐 수 있다"고 말했다.
선발형은 일본이나 대만, 중국 등 가까운 동양권에서 찾아볼 수 있는 체제. 학교 단위나 학교연합 단위에서 관장하는 시험을 통해 선발한다.
프랑스나 독일의 경우는 기본적으로 학생들이 학교선택권을 갖지만 학교에서 선택을 좌우할 정도의 진로안내를 제공하고 있다. 진학과정에서 시험을 치르기도 하지만 성적은 단지 진로지도의 자료로 활용될 뿐이다.
우리의 고입제도가 선진국과 가장 다른 점은 사립학교도 학군으로 묶어 학생배정에 포함시킨다는 것. 교육개발원 김 연구원은 "일본의 경우 사립학교는 사기업이나 마찬가지로 보기 때문에 문부성이 아닌 경제부처에서 관할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정곤기자 kimjk@hk.co.kr
최근 고교평준화 관련 주요인물 멘트
노무현 대통령
"섣불리 건드려선 안된다. 있는 제도를 최대한 활용해 풀어나가는 것이 1차 목표이다"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
"특목고와 자립형 사립고를 늘리고, 중·장기적으로는 사립고의 평준화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
윤덕홍 교육부총리
"평준화 해제는 핵폭탄 같은 위력을 지닌 문제다. 해제시 대단한 혼란이 초래되기 때문이다. 유지 원칙에 변함이 없으며 부동산 때문에 교육정책을 바꿀 의사는 없다"
경제원로 5인
"평준화가 어렵다면 우선 지방부터 시범 실시해 확대할 수 있다"
정운찬 서울대총장
"기회 균등을 보장하기 위해 고교평준화 정책은 폐지돼야 하며 중·고교 입시도 부활시킬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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