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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로" 이용명씨 8년만에 작품집/글없는 여백에 번지는 감동 "카툰홍수속 정수 보여줄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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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로" 이용명씨 8년만에 작품집/글없는 여백에 번지는 감동 "카툰홍수속 정수 보여줄것"

입력
2003.10.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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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 카툰'의 진수를 보여드립니다." 40년 가까이 카투니스트의 외길을 걸어온 이용명(60·사진)씨가 오랜만에 카툰집을 냈다. '사이로(史二路)'라는 필명으로 더 알려진 그가 8년 만에 낸 작품집 '사이로 여행기'(초록배매직스 발행)는 '에세이툰', 또는 '카툰에세이'라고 불리는 신종 카툰이 쏟아지고 있는 가운데 나온 것이어서 더욱 눈길을 끈다."본래 한 컷의 그림 속에 모든 이야기를 담는 것이 카툰입니다. 제목이나 캡션 없이 그림 하나로 많은 이야기를 함축해 보여주는 것이죠. 요즘 나오는 설명이 많은 작품들과는 구별되지요." 최근에는 호흡이 긴 스토리가 있는 작품들까지 카툰이라고 폭 넓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지만 '순수 카툰'의 세계는 조금 다르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이번 카툰집에 실린 작품들에도 아무런 글이 붙어있지 않다. 20여년 전 작품부터 최근에 그린 작품까지 들어있다. 주요 소재는 그가 고향 삼척에서 어린 시절 보고 느낀 산과 들, 나무, 달, 소, 초가집 등 옛날의 서정적인 풍경이다.

황소가 초가집 지붕 위에 올라가 지붕으로 이은 볏짚을 뜯어내 씹고 있다. 밀집 모자를 쓰고 지게를 진 농부가 깜짝 놀란다. 나무에 매어 놓은 소가 풀을 뜯은 자국이 나무를 중심으로 소용돌이처럼 난 들에서 소 주인이 팔베개를 한 채 누워 낮잠을 즐기고 있는 작품도 그렇다. "사람의 마음 속 깊이 아로새겨진 이미지는 결코 지워지지 않지요. 내 유년의 고향은 엊그제 본 것처럼 생생하고 아직도 못다한 이야기가 많아요."

그의 유머는 소박하다. 책으로 가득찬 높다란 서가에서 한 사람이 아래로부터 책을 조금씩 빼내 계단처럼 딛고 올라가 한 권의 책을 꺼낸다. 클라이밍에 관한 책이다. 한 사내가 강에서 뜰채로 금 덩어리를 건져올리고 있다. 금 덩어리 모양이 초생달 같다. 로또 복권이 한창 인기를 누릴 때 그는 이런 상상을 했다고 했다.

그림만 있기 때문에 한 눈에 작가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있는 작품도 있지만 한참 들여다봐야 하는 것들도 있다. 땡볕 아래, 벌거벗은 산모퉁이에 핀 한 송이 꽃에 한 사람이 물을 주고 있다. 그가 걸어 온 발자국은 녹색이 하나도 없는 들로 이어지고 그 끝에는 빌딩만으로 가득찬 도시로 이어진다. 녹색이 하나도 없다. 20여년 전 그린 이 카툰은 사막화 현상을 표현한 것이다. 도심 속의 분주한 생활이나 공해 문제 등을 다룬 문명비판적 성격의 작품들도 있다.

"카툰은 지적 게임이지요. 작품마다 숨겨진 이야기가 있고, 잘 훈련된 독자는 그걸 감지합니다. 퍼즐과 같다고 할 수 있지요." 이런 이유 때문에 카툰은 너무 쉬워서는 안되며 독자들이 조금은 생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또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은 카툰의 소재가 될 수 없으며 상상의 세계에서만 가능한 것들을 다루어야 한다고 말했다.

1965년 '아리랑'지 신인 만화상 수상으로 본격 데뷔하기 전부터 지금까지 카툰의 재미에 빠져 있지만 결코 쉽지 않은 길이었다. 동료 만화가들이 극화를 그리며 인기를 누릴 때도 그는 별로 알아주지 않는 카투니스트의 길을 고집했다. 2000년 청강문화산업대 교수로 자리를 잡을 때까지 그는 프리랜서였다. "생활이 넉넉하지 않았지만 카툰의 매력을 놓칠 수는 없었지요." 남들이 종로 길을 걸을 때 피맛길을 택했지만 즐거운 길이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남경욱기자 kwnam@ 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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