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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老鋪]<6> 종로양복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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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老鋪]<6> 종로양복점

입력
2003.10.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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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은 날개다. 희망의 날개다. 종로양복점의 3대 주인 이경주(李景柱·58)씨는 그렇게 생각한다. 강산이 바뀔 정도로 오랜 세월 양복을 만들면서 체득한 소박한 믿음이다. 그는 그러한 믿음을 양복에 담아내려고 노력한다. 고객의 모습을 떠올리며 옷을 찾으러 올 때까지 한번이라도 더 손을 대는 이유다."아버지는 생전에 '아무리 잘 만들었다고 해도 손님이 만족하지 않는 옷은 옷으로서 가치가 없다' 고 말씀했습니다. 그 말의 뜻을 늘 마음에 새겨두고 있습니다." 경주씨는 선친의 이야기를 빌려 자신의 마음을 전한다.

서울 종로구 신문로 1가 근우빌딩. 2층으로 오르는 계단 입구에 'SINCE 1916'의 글자가 씌어진 작은 간판이 붙어 있다. 그 간판을 놓친 사람들에게 종로양복점은 그냥 평범한 양복점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의 세빌로우로 불리는 소공동의 맞춤양복점도 아닌 바에야 더욱 그럴 것이다(세빌로우는 고급맞춤양복점이 밀집돼 있는 영국 런던의 거리다).

그 빌딩 2층의 10평 남짓한 공간이 올해로 창업 87년을 맞은 종로양복점의 영토다. 한국최고의 역사를 지닌 양복점의 전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좁은 공간이다. 여기서 경주씨는 손님들에게 희망의 날개를 달아주는 작업을 한다.

보신각 부근에서 옮겨간 종로 1가의 가게가 재개발로 헐리게 되면서 지난해 이 곳으로 이전했다. 단골손님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찾기가 어려운 위치다. 실제로 며칠 전 포항공대의 한 교수는 물어물어 20여년 만에 찾아와 양복을 맞췄다. 외국유학을 마치고 대학에 자리를 잡은 그 교수는 종로 1가 시절을 떠올리고 헤맸던 것이다.

"이시영 초대부통령과 독립투사 김석원장군, 협객 김두한씨도 우리집의 단골손님이었습니다. 국회가 여의도로 옮겨가기 전, 그러니까 종로가 실질적인 정치 1번지 시절엔 국회의원 등 정객들도 많이 찾아왔습니다." 경주씨가 조부와 부친에게서 전해들은 이야기다. 일제강점기 종로일대의 한국상인들을 일본주먹으로부터 보호해준 김두한의 옷에 얽힌 일화는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김두한은 특히 고학생들에게 자상했다. 그들이 찾아오면 "전당포에서 돈과 바꿔 쓰라"며 입고 있던 양복을 선뜻 벗어주었다.

할아버지 이두용(李斗鎔·1881∼1942)이 종로양복점을 창업한 해는 1916년. 1년간 도쿄의 양복기술학교에서 유학을 하고 귀국한 그는 종로 네거리 보신각 옆에 양복점을 차렸다. 그의 집안은 인평대군의 후예로 서울에서 누대를 살았지만 가세는 빈한했다. 생계를 위해 열 다섯 살 때 일본양복점에 취직했다. 한국양복의 태동기에 그는 양복점 운영에서 미래의 빛을 발견하고 일본유학을 결행한 것이다.

이두용은 일본에서 배운 기술과 신용을 바탕으로 일본양복점과 경쟁을 하면서 사업을 확장해간다. 그는 광고에도 탁월한 감각을 지녔다. 어느 해 장충단에서 복장상공인 운동회가 열렸다. 그는 키가 9자나 되는 마네킹에 모닝코트를 입혀 가장행렬을 한 뒤 양복점 앞에 세워두고 고객의 시선을 끌었다.

1928년에는 개성과 함흥에 지점까지 개설했다. 호사다마라고 할까, 일본상인들의 시기와 모함을 받아 일경에게 값이 비싸다는 트집을 잡혀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 무렵 양복점과 바느질공장에는 재단사 등 직원만 100여명에 이를 만큼 종로양복점은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렸다.

종로양복점의 2대 주인은 이두용의 9남매중 넷째인 해주(海注). 보성전문 상과를 나온 그는 처음에 은행에 들어갔다. 그러나 부친의 뜻에 따라 만주의 정자옥(丁子屋)양복전문회사에 취직해 양복점 운영에 필요한 실무와 기술을 익혔다. 광복과 함께 귀국한 그는 반세기 가까이 양복점을 운영했다.

경주씨는 94년 부친이 세상을 떠난 뒤 대를 이었다. 대학에서 건축공학을 전공한 그는 68년부터 재단기술을 배우고 가업계승 준비를 했다. 이미 다른 직업을 선택한 두 형 대신 그를 후계자로 선택한 부친의 권고를 받아들였다. 재단을 배우는 동안 너무 힘들어서 여러번 집어치우려고 집을 나가기도 하는 등 부친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맞춤양복은 80년대를 기점으로 내리막길을 걷는다. 80년대만 해도 매달 200∼300벌의 양복을 만들었지만 90년대 들어 대기업의 기성복에 밀려 매출이 뚝 떨어졌다. 가업의 발전을 위해 최근 형제들이 뜻을 함께 했다. 우선 젊은이들의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얼마 전 웹사이트(bellstreet.com)를 개설했다.

"양복을 만들 때 재는 20가지 신체지수가 같은 사람은 아직까지 보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사람은 저마다 타고난 개성이 다릅니다. 맞춤양복점을 찾는 고객들은 대체로 개성이 강합니다. 이런 분들은 아무리 좋은 기성복을 거저 주어도 입지 않습니다." 경주씨는 기성복에서 개성을 찾는 요즘 젊은이들의 취향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유행에 민감한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답지 않게 그는 유행을 쫓지 않는다. 아주 멀리하지도 않는다. 중용을 추구한다고나 할까. 언제 입어도 남세스럽지 않은 호흡이 긴 옷을 손님에게 권한다.

언젠가 경주씨는 남매의 의중을 떠보았다. 미대 대학원에 다니는 아들(29)은 가업계승 의사가 없는 듯했다. 대학에서 의상학을 부전공으로 택한 딸(27)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는데 직장생활을 하면서 망설이는 눈치다.

"종로양복점은 4대째 대물림이 성공적으로 이뤄져 2016년 창업 100주년을 맞게 될 겁니다. " 이경주씨는 자신있게 말한다.

이기창 편집위원 lkc@hk.co.kr

도움말 김용범(소설가)

우리나라에서 양복을 제일 먼저 입은 사람은 누구일까. 한말 개화를 이끈 김옥균 서광범 유길준 홍영식 윤치호 등으로 기록돼 있다. 이들은 1881년을 전후해 수신사 또는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오면서 양복을 착용, 물의를 일으켰다고 전한다.

김옥균 등이 입은 양복은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검은 색의 색코트(sack coat)였다. 깃은 턱 밑까지 바짝 파고 들었고 앞섭은 가슴에서 무릎까지 벌어진 스타일이었다. 이처럼 양복은 개화의 선두에 선 정객들이 입은 옷이라고 해서 한동안 개화복으로 불리기도 했다. 18세기 유럽에서 스포츠웨어로 등장한 색코트는 그 뒤 미국에서 크게 유행했으며 1870년대부터 서구에서 남성의 평상복으로 자리잡게 된다.

'한국양복사 100년'(김진식 지음)에 따르면 국내에서 양복이란 말이 처음 사용된 계기는 고종 32년(1895년) 내부고시로 외국복제가 공인되면서부터. 복제의 개혁 역시 갑오경장의 일환으로 추진된 것이다. 김옥균 등이 처음 선보인 양복이 14년 만에 비로소 법령으로 공인을 받게 된 것이다. 이듬해 민영환은 러시아황제의 대관식에 대례복차림으로 참석한다. 이에 앞서 1889년 일본인이 서울에 한국 최초의 양복점을 낸다. 하마다란 상호의 양복점은 한국주재 일본공사관 직원과 일본군대의 군복을 만들다가 조선왕실의 양복도 주문받아 납품한다.

남자보다 뒤처져 양장을 하는 신여성도 등장한다. 1899년 미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윤치호의 부인이 양장을 입은 첫 여성이었다. 이어 이듬해 한국최초의 여의사 박에스터가 양장차림으로 미국에서 귀국했다. 비슷한 시기에 고종황제의 엄비가 양장에 모자와 양산을 갖추고 기념촬영한 사진이 전한다.

1903년 한국인에 의해 처음으로 한흥양복점이 문을 연다. 이를 기점으로 서울과 지방에 한국인인 운영하는 양복점이 차례로 생긴다. 30년대 서울의 양복점은 400여 개로 늘어나는데 한국인과 일본인이 운영하는 양복점 사이에는 갈등관계가 형성됐다. 민족감정이 개입된 것이다. 종로를 중심으로 한 북촌지역에는 한국인, 명동과 충무로를 중심으로 한 남촌지역에는 일본인의 양복점이 들어서 오랫동안 경쟁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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