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티르 모하마드 말레이시아 총리만큼 미국 일변도의 국제질서에 대립각을 세운 지도자는 드물다. 1997년 아시아에 IMF 경제위기가 발생하자 그 탓을 조지 소로스 등 투기 자본가에게 돌리며 아시아적 가치를 내세워 IMF 에 맞섰고, 9·11 테러 후에는 이슬람권의 단결을 앞장서 주창하고 있다. 세계무역기구(WTO)를 소수국가에 의한 착취수단이라고 비난하는가 하면, 미국이 대 테러전을 핑계로 이슬람 국가를 공격하는 것은 유대인의 음모에 놀아나는 새로운 인종차별이라고 거침없이 말한다.■ 최근에는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이슬람 정상회의에서 "13억명에 달하는 이슬람인들이 불과 몇 백만명에 불과한 유대인에게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주장, 파문을 일으켰다.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방콕의 APEC 정상회담장에서 "당신은 잘못된 발언으로 (국제사회에) 불화를 조성하고 있다"고 면박을 준 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맥클렐런 백악관 대변인으로 하여금 이를 언론에 발표토록 했다. 마하티르도 지지 않고 부시 면전에서 "사실을 말했을 뿐"이라고 응수했다. 그리고 나서 공개연설을 통해 APEC을 설립 취지인 경제협력과 달리 안보적 측면에서 접근하는 부시의 태도를 정면 공격했다. 두 정상간의 설전은 외교적 수사나 의전과는 거리가 먼 것이어서 호사가들의 관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 도발적 발언의 노림수가 무엇이고, 이에 동의하느냐 여부를 떠나 마하티르가 일방적으로 굴러가는 세계화와 미국 패권주의라는 거대담론에 제동을 걸고 있다는 점만큼은 인정해 줘야 한다. 비판자들은 그가 국내에서 독재체제를 강화하고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계산된 발언을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일방주의와 이의제기 없는 논리는 결국 도그마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마하티르는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간에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 그는 31일 약속대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22년에 걸친 장기집권을 마감한다. 의대출신으로 10년 동안 의사생활을 하기도 한 '늦깎이' 정치인이었지만, 원료 수출국이었던 가난한 말레이시아를 세계 17대 경제국이자 첨단산업국가로 만들어 놓았다. 마하티르의 치적에 대한 평가는 그의 발언만큼이나 논란의 소지가 많다. 철저한 개발독재주의자였기 때문이다. 후계자로 지목했던 안와르 이브라힘 부총리가 대들자 동성애자로 몰아 투옥시켰고, 언론과 정치권을 무자비하게 탄압한 독재자이지만 말레이시아의 풍요를 일궈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병규 논설위원 veroic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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