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여자 농구 최고의 스타 박찬숙(45)씨는 대인관계에서 스타일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코드 맞는 사람을 중용하듯 박씨는 "스타일이 맞는 사람은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 점에서 그에게 한국여자농구연맹의 조승연(59) 전무는 스타일이 맞아 평생 모시고 싶은 스승이다.박찬숙은 1981년 대표팀 코치로 처음 부임한 조 전무와의 첫 만남을 "마치 여고생이 남자 선생님 좋아하듯 맘이 끌렸다. 그러나 그 감정은 다름 아닌 존경심이었다"고 기억한다. 당시 조 코치가 무명이었던 것에 비해 박찬숙은 이미 75년 여고 1년 때 최연소 국가대표로 발탁된 절정기의 대스타였다. 그래서인지 조 코치는 첫 대면에서 무척 조심스럽고 겸손해 하는 눈치였다는 게 박찬숙의 설명.
그러나 박찬숙은 곧 그것이 조 코치의 스타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선수들 일에 거의 참견하지 않고 말없이 뒤에서 관리하는 젠틀맨, 부친의 대를 이은 농구선수집안 출신, 고려대 철학과에 입학한 뒤 농구를 시작한 지식인이라는 것도 알았다. 첫 만남부터 조 코치의 스타일은 박찬숙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한국이 84년 LA올림픽에서 구기사상 감격의 첫 은메달을 따낸 것도 아마 둘의 절묘한 화음 때문인지 모른다.
조 코치는 83년 대표팀 감독으로 승격했다. 그 당시 박찬숙은 선수생활에 최대 위기를 맞고 있었다. 오른쪽 무릎 연골을 수술한 뒤 곧바로 은퇴를 선언한 것이다. 표면적인 이유는 부상이었지만 사실은 새로 부임한 코치의 강압적인 지도스타일이 맞지 않아 대표팀을 나오고 싶었다. 병원으로 박찬숙을 찾아와 허심탄회한 대화 끝에 은퇴 이유를 알아낸 조 감독은 "그럼 내가 직접 지도하겠다"고 약속, 은퇴를 철회하게 만들었다.
조 감독의 지도 하에 선수단은 정말 '눈빛만 봐도 안다'고 할 정도로 일심동체가 되어 훈련했다. 그러나 올림픽 첫 출전의 한국이 좋은 성적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미국 캐나다 유고 호주 중국 등의 전력을 평가할 때 한국은 6개국 중 6위였다. 모두가 두려운 상대였던 만큼 선수들은 "창피만 당하지 말자"며 서로를 위로할 정도였다.
그러나 조 감독의 심리전이 빛을 발했다. LA의 선수촌에 도착해서 어느 날 훈련 후 식사하러 가는 길에 우연히 첫 상대인 캐나다팀과 마주쳤다. 그 때 캐나다 감독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조 감독은 "얘들아, 캐나다 감독이 한국만 이기면 메달 딸 수 있다고 그런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그 말을 들은 선수단의 분위기는 단번에 달라졌다. "캐나다도 우리를 두려워 한다고?" 선수들 사이엔 갑자기 자신감이 팽배했다. 그 때문인지 선수들은 120%이상의 기량을 발휘하며 캐나다 유고 호주 중국을 연파하고 결승까지 올랐다. 박찬숙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조 선생님은 장신의 상대 선수들에게 리바운드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철저히 지공전과 대인마크 전술을 썼고 이것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어요. 선생님은 '코트의 컴퓨터'라는 별명처럼 매사 준비가 철저했지요. 아마 캐나다가 우리를 두려워한다는 말도 계획된 전술 중 하나였는지도 모르죠."
선수생활을 은퇴하고 태평양 감독시절이던 92∼94년 박찬숙은 스승과 맞대결을 벌이곤 했는데 그때도 조 감독은 늘 "박 감독"이라 부르며 존중해 주었다. 박찬숙에게 조승연은 젠틀맨의 이미지에서 벗어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사람이 내 맘에 든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죠. 보면 반갑고 좋고, 변함 없다는 느낌, 그러고 언제나 잘 모시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을 보면 정말 좋은 인연 아닌가요?"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한마디 덧붙인다.
"남편에게 쉽게 끌린 것도 어쩌면 남편에게서 조 선생님과 비슷한 면을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르죠. 무뚝뚝하지만 부드럽고 항상 뒤에서 챙겨주는 그런 말 없는 남자…."
/유승근기자 us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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