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만나보기로 한 건 순전히 개인적인 호기심 때문이었다. 얼마 전 일요일 밤에 잠들기 전 무심히 TV 리모컨을 이리저리 눌러보다 문득 손가락의 움직임이 멎었다. 전에 못 보던 배우 때문이었는데 세상에, 그렇게 웃길 수가 없었다. 순간순간 변화무쌍한 표정, 우스꽝스러운 과장된 몸짓, 비음(鼻音)에다 요들을 하듯 가성(假聲)이 섞인 기묘한 발성…. 고인(故人)에 양해를 구하고 말하자면 이주일(李朱一)씨 뒤로는 아마 처음인 듯 싶었다. 웃기려 용을 쓰지 않아도 천연덕스러운 표정과 몸짓 만으로 웃음이 나오게 하는 그런 연기자는. (이 또한 개인적인 느낌이니 혹 동의하지 않는다고 시비는 말길)몸값 비싼 유명탤런트나 개그맨이 아니다. TV ‘재연(再演)배우’ (좀 이상한 조어인데 일상으로 쓰인다. 모든 배우의 연기란 게 삶을 재연하는 일이거늘) 소재익(蘇在益.35)씨 얘기다. 그가 출연하는 MBC TV의 ‘타임머신’은 예전 가십성 사건을 희극적으로 재구성하는 프로그램이다. 그 뒤로 몇 번을 더 보다가 아예 그의 팬이 됐다. ‘아르바이트식으로 잠깐씩 나와 저렇게 웃기니 실제 만나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그래서 이번엔 심각한 주제를 털고 오랜만에 그냥 유쾌한 기사를 쓰겠다는 가벼운 생각으로 그를 찾았다.
어차피 재연배우의 일이란 게 전업(專業)일수는 없으려니 했지만 소재익씨의 직업이 유치원 선생님이라는 건 정말 뜻밖이었다. 도대체 그렇게 웃기는 그가 어떻게 아이들을 가르치는 지 궁금했다. 그래서 그가 현재 체육수업을 맡고있는 4개 유치원 중 하나인 서울 도봉구 도봉2동 ‘지예미술학원’에서 수업을 참관했다.
“발바닥 뽀뽀.(두발을 모아요)” “자, 아빠다리.(책상다리로 앉으세요)” “큰 비행기 했나요?(팔 벌려 서요)” “엑스 가면!(팔짱 끼어요)” 스무명 남짓한 올망졸망한 아이들은 선생님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까르르 자지러진다. 30여분간 간단한 체조동작과 태권도 자세를 가르치는 시간이지만 개구장이들의 관심은 개구리마냥 사방으로 튄다. 그럴 때마다 예의 TV에서의 그 표정과 말투로 순식간에 아이들의 시선을 다시금 돌려 세운다. “웃지 마세요~.” “오잉?” “우리 친구들, 너무 멋지다~.”
한 구석에서 여자아이가 돌연 울음을 터뜨린다. 손잡고 하는 놀이에서 짝이 된 남자아이가 딴전을 피워 속상해진 듯. 선뜻 안고 달래자 아이는 금세 웃음을 되찾았다. 똑같이 뒹굴고 땀 흘러가며 아이들을 다루는 모습이 능수능란하다. 슬그머니 한 아이에게 선생님에 대해 물었더니 귀 따가운 합창이 터져 나왔다. “좋아요.” “너무너무 재밌어요.”
수업이 끝나자 소씨는 전혀 다른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유치원 선생님이 코미디 연기를 그렇게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지. 어디서 따로 배웠습니까?” “저는 원래 연극배우입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그의 직업은 따로 또 있었다. 이어 들은 그의 이력이 워낙 다양하니 아예 다 털어놓고 얘기를 시작하자. 그는 연극배우에, 유치원 체육교사에, TV 재연배우이면서 보디빌더 출신의 헬스클럽 강사(생활체육지도자 자격증도 있다)인가하면, 태권도 사범이면서 그룹 활동을 한 기타리스트고, 성우이기도 하다. “아니, 어떻게 그런걸 다….” “다 한 길로 통하기 때문이지요. 가령 연기를 하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운동을 하는 것들이 별개가 아닙니다. 다 연결돼 있지요.”
즉 이렇다는 말이다. “가장 어려운 게 아이들 앞에 서는 일입니다. 연기는 대본을 받아들고 무대에 서기 전까지 면밀하게 행위를 계산하는 과정이 있지만 아이들 앞에서는 그런 게 불가능합니다. 한마디로 예측 불가지요. 돌발상황의 연속이지요. 한참 수업에 몰입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선생님, 오줌 마려워요’ 이런 겁니다. 또 우는 아이를 달래는 데 너무 깊이 들어가면 전체 수업의 리듬이 깨지기도 하구요. 더구나 30~40분 이상 그 주의 산만한 아이들의 관심을 붙잡아 둔다는 건 정말 보통 일이 아니지요. 거기서 관객들한테 밀리지 않는 법을 배웁니다.”
그는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 연극을 시작했다. 지금은 미국에서 태권도 도장을 운영하는 형님이 예전 극단 ‘미추’의 배우였다고 하니 일찌감치 인연은 있었던 셈이다. 서울 동숭동 대학로에서 극단 ‘사조’ ‘연단’ ‘ITI’ 등에 몸을 담았다. ‘파우스트’에서는 악마를 재해석한 무천(巫天)역을 맡았고, ‘스토킹’이란 극에서는 MC, 스토커, 인부, 변호사 등 1인7역을 맡았다. 그런가 하면 아동극단 ‘나이테’에서는 ‘꼬마마녀 위니’를 연출하기도 했고, ‘사랑을 먹고사는 나무’라는 희곡을 써서 문예진흥원의 지원작품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벌써 1년을 훌쩍 넘긴 ‘타임머신’의 출연은 아주 우연이었다. 그의 아동극에 배우로 출연했던 이가 주선해 ‘재미있겠다’는 생각으로 나가봤다. 첫 출연작은 ‘KFC할아버지 가출사건’이었다. 일본에서 있었던 일을 패러디한 것인데 밤 늦게 술 취한 회사원이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집의 마네킹 할아버지를 안쓰럽게 여겨 집에 데려간 가십성 사건이었다. 거기서 그는 주인공 나까무라(예전부터 왠지 시원치 않은 일본인은 왜 다 나까무라였는지 모르겠다)역을 맡았다. 잔뜩 꼬부라진 혀에 풀린 눈으로 “할아버지, 지금 몇신데 여기 계셔요~”하는 식이었다. 천연덕스러운 첫 연기로 칭찬을 받고는 자신감이 생겼다.
이후 온갖 망가지는 역은 도맡았다. 한번은 ‘앙드레 봉’이라는 여장 미용실원장 역을 했는데 너무 모 원로 디자이너를 연상시키는 연기를 하는 절묘하게 해내는 바람에 CP(책임 프로듀서)까지 나서 본인에게 직접 사과하는 일까지 빚어졌다. 어쨌든 지금은 단단히 신뢰를 얻어 감독에게 “이 장면에서는 이렇게 하면 안될까요”하고 건의하면 “그래, 너 하고싶은 대로 해봐라”고 할 정도가 됐다. 그러니 거의 매주 고정출연이다. 하루종일 12시간쯤 꼬박 촬영해봐야 TV에 나오는 건 단 5분 정도지만. (이쯤까지 했어도 여전히 “도대체 누구 얘기를 하는 거야?”하는 이가 있다면 일요일 밤 ‘타임머신’이란 프로를 한번 직접 보기 바란다. 정말 그의 연기는 재미있다)
“‘타임머신’ 출연도 사실은 연기공부를 위한 것이에요. 거기서 하는 오버연기라는 게 아슬아슬하게 수위를 조절하는 일입니다. 너무 많이 나가거나, 거꾸로 미치지 못하거나 하면 보는 입장에서는 역겹든지, 재미가 없지요.” 어쨌든 그는 이 프로그램의 출연으로 전에 없던 팬도 생겼다. 사인이나 사진 찍자는 요청도 받고, 음식점에서도 푸짐한 서비스도 곧잘 받는단다. “아저씨 때문에 그 프로 봅니다”라는 말을 듣고는 하루종일 들뜬 기분으로 지내기도 한다. 덕분에 영화에도 캐스팅되고 CF 섭외도 들어온다고 했다.
그러나 소씨가 생각하는 자신은 ‘결국 연극인’이다. 무대에서 훌륭한 연기를 하고 좋은 작품을 연출하는 게 그의 꿈이다. 또 다른 연기공부를 웬만큼 했으니 ‘타임머신’ 출연도 올해 말이나 내년 초까지만 할 생각이다. “영화나 TV 쪽을 택하면 돈도 훨씬 많이 벌 수 있을 텐데 왜 굳이 연극을…” (그는 유치원과 ‘타임머신’ 일로 한 달에 200만원 남짓 손에 쥔다. 사는 데는 별 문제없다고 했다) 이 질문을 기다린 듯 했다. “연극의 매력은 한번 맛들이면 절대로 헤어나올 수 없습니다. 관객과 지척에 마주한 소극장 무대에서 처음 막이 올라 걸어나올 때의 그 두근거림, 첫 대사를 성공적으로 내뱉어야 비로소 정상으로 돌아오는 심장박동, 관객과의 시종 팽팽한 기 싸움 등….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지요.” 몸 가꾸는 데 열심인 것도 연기를 위한 것이다. “뚱뚱한 배역이야 옷이나 소품 등으로 그때그때 어떻게 소화할 수 있지만 좋은 몸이 필요할 경우는 그렇게 할 수 없잖아요.”
그는 그 나이에도 아버지와 둘이 산다. 어머니는 군에 있을 때 여의었다. 유치원에서 만나 사귀는 선생님과는 내년쯤 결혼할 계획이다. 속 썩이던 아들(전북 전주가 고향인 그는 선배들과의 싸움으로 고교 2학년 때 자퇴하고 대입 검정고시를 거쳤다)이 어쨌든 제 길을 열심히 가고있는 걸 대견해 하시는 아버지가 가장 고맙다고 했다. “그래도 가끔 술 드시면 한마디씩 하시지요. ‘너 꼭 그렇게 웃겨야겠냐?’고. 아들의 우스운 모습이 영 내키지 않으신 거지요.”
이날도 얘기 중에 휴대폰으로 금요일 강화도에 촬영 나오라는 방송사의 연락이 왔다. 정화조 속으로까지 달아난 도둑을 끝까지 추격하는 형사 역이란다. 그러니 크게 또 한번 망가져야 할 판이다.
어쨌든 그를 만난 건 한바탕 웃고 싶어서 였는데 끝내 그러질 못했다. 삶을 대하는 그의 태도가 너무도 진지해서였다. 하기야 우리가 저만 중히 여겨 그렇지, 누구에게든 어디 가벼운 인생이란 게 있으랴. 그러니 비록 이름없는 재연배우의 한 컷 연기일지라도 마냥 대수롭지 않게 보아 넘길 일은 아니다. 그 잠깐의 우스운 몸짓에도 사실은 혼신을 다한 그의 삶 전체가 배어있는 것이니.
편집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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