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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 "옥중 수양록" 단독 입수/"납치·하야" 실패후 3차례 시해계획 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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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 "옥중 수양록" 단독 입수/"납치·하야" 실패후 3차례 시해계획 세워

입력
2003.10.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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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은 '옥중 수양록'에서 10·26사건을 '7년여의 준비끝에 이뤄낸 혁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옥중수양록에 따르면 그는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행위를 '유신독재'를 청산하기 위한 거사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1972년 10월 유신과 더불어 이 나라의 자유민주주의는 아무 까닭없이 박정희 대통령의 영구집권을 위해 말살되고있다고 평가했다. 당시 격분한 그는 자신의 한 목숨을 바쳐서라도 자유를 회복하겠다는 일념에 박 대통령을 납치, 하야시킬 생각을 했고 이후 74년과 75년, 79년 4월에 권총을 품에 안고 결행을 하려했으나 정리(情理)가 가로막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이후 7년이 지난 1979년 10월26일에 자신의 생각을 실천에 옮긴다. 그는 유신체제로 지탱하고있는 박 대통령만 제거하면 다른 것은 손댈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최소의 희생으로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했다. 다음은 대학노트 32쪽 분량 옥중수양록의 요약이다.

1월21일

제2심 고등군사재판이 내일로 다가왔다. 1심에서의 기록이 정확히 남아야 한다. 역사에 귀중한 자료이며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사가 되기 때문이다. 항소 이유서가 제출되기 전에 고등 군사 재판 일자 통보를 받고 이미 이 군사재판은 기대할 것 못 된다고 생각, 단념한다.

불교에 귀의하여 마음에 평온을 찾았다. 육신을 어떻게 다루던 알 바 아니다. 마음의 본성(本性)은 공(空)이다. 본성만 확고히 잊지 않으면 세상에 아무런 두려움이 없다. 강(신옥)변호사가 최종적으로 면담 마치고 갔다. 보안사 요원들이 항소 포기 시키기 위해 공작하고 있다는 것 전달하고.

1월24일

고등군사재판 제 2일째 14시, 고등 군사재판 심리로 이제 언도 공판이 남았다. 매사는 끝났다. 재판장 윤흥정 장군, 성의껏 해주었다. 법무사 검찰관 성명은 모르나 예의도 지켰다. 부처님께 소원한다. 박선호, 박흥주외 경비원 일동, 김계원, 정승화 장군 극형만은 면제되게 해 주십시오.

1월 27일·자유

1972년 10월 유신과 더불어 이 나라 자유민주주의는 아무 까닭없이 박정희 대통령 각하 영구집권을 위해서 말살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어언 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우리의 자유는 그 근본을 알아야 한다. 일제로부터 자유 독립을 위해 3.1 운동을 위시해서 수많은 투쟁과 희생의 결과로 찾아진 것이다. 그리고 2차 대전의 고귀한 희생이 우리 자유 쟁취를 도왔다. 그리고 6.25, 4.19 등 엄청난 희생의 소산으로 지켜진 것이다. 이런 자유를 집권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말살한다는 것은 천인이 공노할 중대한 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다.

혁명

나는 1972년 10월 제3군단장으로 복무하면서 헌법을 몇 차례 보았다. 그러나 이 헌법이 아무리 보아도 민주 헌법이 아니고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영구 집권을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간단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격분했고, 박 대통령이 한없이 미워졌다. 당장 옆에 있으면 주먹질을 할 정도로 미워졌다. 이 때 나는 생각했다. 이 목숨 하나 바쳐서라도 이 자유를 회복해야 하겠구나 하고. 그 해 신체제에 의해 당선된 대통령은 군단 연말시찰을 했다.

나는 이 기회에 대통령을 납치, 하야시킬 생각을 하고 준비를 했다. 군 영내에 깊숙이 들어 온 이상 얼마든지 가능했다. 모든 준비를 완료, 대통령을 만났으나 차마 결행할 생각이 우리들의 정리 때문에 사라졌다. 결국 못하고 말았다. 자신을 졸장부로 생각, 비웃었다. 그 후 다음 해인 1973년, 3월 생각지도 않던 유정회 국회의원으로 본인 의사도 물음이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해서 알려 왔다. 본인은 군인으로 좀 더 봉사하겠다고 했으나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리하여 30년 군생활의 종지부를 찍고 49세에 예편했다. 생각하면 고생도 되었으나 보람도 있었다. 서운한 감 금할 길이 없었다. 국회의원 생활 10개월쯤 되어 중정 차장으로 발령되어 국회의원을 그만두고 중정 근무했다. 중정 근무 당시 민청학련 사건을 위시하여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본인은 민주화 운동과 통제에 도전하는 정당한 주장자들을 처벌하는데 나의 양심과 직책의 틈바구니에서 고민했다. 나는 항상 주장했다. 소수로 처벌대상을 추리라고, 그러나 사건은 꼬리를 물었다. 때로는 혼자서 격분도 해 보았다. 긴급조치로 옴짝달싹도 못하게 만들었다. 이런 놈의 정치가 어디에 있나. 주인은 국민인데. 국민을 우매하게 보아도 분수가 있지 나는 생각했다. 국민은 우매하게 보일런지 몰라도 결코 우매하지 않다. 민심이 천심이라고 했다. 국민이 우매하다면 하늘이 우매하다는 것이다. 하늘이 우매한가. 하늘을 우매하다고 보는 사람이 우매하지. 나는 그후 10개월 후에 건설부 장관으로 전보되었다. 나는 밉고 미운 유신독재를 타파하기 위해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유신독재를 박 대통령 각하 혼자서 지키고 있으며 나머지는 그저 따라 하기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우리 국민들 전부도 자유를 갈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누가 어떠한 방법으로 유신독재 체제를 물리칠 수 있겠는가 하고 사방을 돌아 보았으나 그러나 아무도 용기를 낼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하는 수 없구나 내가 하는 방법 이외에는. 이리하여 1974년 9월 14일 건설부 장관으로 사령장을 받는 자리, 청와대 접견실에서 대통령을 희생시키고 본인도 그 자리에서 자결하는 방법을 결심하고 당일 나는 권총을 몸에 품고 입장했다. 그러나 막상 결행하려고 하니 인정이 나를 가로막았다. 불발로 마치고 서글펐다. 자신의 못남을 뉘우쳤다. 그러다가 해는 바뀌어 다음 해인 1975년 2월 초도순시 건설부에 대통령 각하께서 오셨다. 나는 그 날도 완전한 준비를 해 놓았다. 또 마찬가지로 용기부족과 인정이 나를 막았다. 그리고 나는 이제 단념하는 수밖에 없다고 유서와 태극기를 모두 불태우고 말았다. 그 후 1976년 12월 4일 돌연 대통령께서 집무실로 부르셨다. 갔더니 중정부장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순간 기분은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본인은 좋다 그러면 이제는 순리적 방법으로 대통령을 설득하여 유신체제를 고쳐보자, 절호의 찬스다 라고 생각하면서 처음에는 대통령의 의중을 탐색하는 데 노력했다. 그러나 조금도 틈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미련스럽게 틈만 있으면 슬슬 완화해보시도록 이야기해 보았으나 어림도 없었다. 국내 여론은 물론 혈맹의 우방 미국이 우리나라 체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 세계의 자유 우방이 우리에 대해서 인상이 좋지 않다는 것 등.

그러나 누가 무슨 소리를 하더라도 조금도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아 나는 이제 다 틀렸다, 마지막 방법으로 혁명을 하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 1979년 4월 혁명을 결행하려고 했다. 그러나 여건이 좋지 않아 미루다가 10. 26일 드디어 결행하고 말았다. 혁명의 목적은 1. 자유 민주주의 회복 2. 국민의 희생을 더 이상 없애고, 예상되는 불행을 예방한다. 3. 적화를 예방한다. 4.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국방 안보를 튼튼히 하고 경제 외교면에서 호혜의 이익을 도모한다. 5. 국제적으로 독재국가라는 낡은 이미지를 씻고 한국민의 명예를 회복한다. 이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유신 체제로 지탱하고 있는 핵인 박 대통령 각하만 제거하면 다른 것은 손댈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최소의 희생으로 목적을 달성했다.

혁명의 성공과 희생

10.26 혁명으로 자유민주주의는 회복되었다. 자유가 흐르는 강을 가로막고 있는 보를 지개해서 물을 흘려 보내는 것과 같다. 이제는 천하 누구도 이 자유의 물결을 가로막을 자는 없다. "이는 천명이요. 대자연으로의 섭리이다." 혁명 결행해서 죽지 않고 살아났다는 것은 기적이다. 나는 죽을 가능성을 90%로 보았다. 그러나 천우신조로 살았다. 혁명 결행이 중요하지만은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혁명 과업수행이다. 근 20년 동안에 어지러진 쓰레기가 산적해 있지 않은가. 혁명적 방법이 아니고 무엇으로 시정할 것인가. 지금도 천하를 활보하고 있는 김종필, 이후락, 박종규, 김정렴, 등 수많은 부정치부자의 재산을 혁명적 방법이 아니고 무슨 방법으로 환수하겠는가. 유신 헌법을 기초하여 국민을 우롱한 자. 긴급 조치를 기초한 자, 무슨 방법으로 다루겠는가. 권력과 결탁하여 집중 융자로 특혜를 받은 대기업들, 중소 기업들의 파산을 외면한 처사는 누가 책임지겠는가.

대통령 일가의 횡포

구국여성봉사단과 큰 영애, 육사의 명예제도와 지만생도 등에 대해 여러 차례 건의했으나 관여치 말라는 노여움만 삼. 혁명과 직간접으로 관계 있으나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이들의 일이라서.

■"머문바 없이 마음을 내라" 금강경 구절로 인생 정리/종이에 적어 노트에 끼워놓아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은 옥중 수양록 노트 갈피에 불경의 한 구절을 흰색 종이에 적어 끼워놓았다. '應無所住 而生其心'(응무소주 이생기심·머문 바 없이 마음을 내라)은 대승불교 최고의 경전인 금강경에 나오는 구절로 무엇을 행한다는 의식에 얽매이지 않는 무애, 무위의 정신 상태를 뜻한다. '세상 모든 일이 인연법에 따라 저절로 일어나고 쇠한다'는 뜻이 담긴 이 불경 구절을 화두로 삼았다는 것은 김씨가 옥중에서 인생을 정리하며 속진의 풍상에 더 이상 구애되지 않는 참 자유의 정신세계를 추구했음을 엿보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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