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로 있다간 가족들 모두 죽고 말 것이라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26일 오후 서울 서부경찰서 형사계. 이날 새벽 남편 최모(52)씨를 흉기로 찔러 살해한 혐의로 조사를 받던 노모(45·여)씨와 큰 딸(23)은 고개를 떨군 채 연신 눈물만 쏟아냈다. 노씨는 전날 오후 11시께 어김없이 만취한 채 귀가한 남편 최씨를 맞았다. 하지만 최씨는 당장 10일 앞으로 다가 온 수능시험을 준비중인 작은 딸(21·대학휴학생)에게 술주정을 한 뒤 노씨와 큰 딸을 불러 놓고 "술을 더 사오라"며 폭력을 휘둘러댔다. 5시간여 동안 가족들에게 행패를 부리던 최씨는 급기야 부엌에서 식칼을 들고 와 가족들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성을 잃은 최씨가 노씨의 목을 향해 식칼을 겨누자 다급해진 큰 딸은 급히 부엌에서 고춧가루를 가져와 아버지의 두 눈을 향해 뿌렸다. 이 와중에 최씨가 칼을 떨어뜨리며 허둥대자 노씨는 칼을 주워 노씨의 가슴을 찌르고 말았다. 노씨의 돌연한 행동은 옆에 있던 딸조차 제지하지 못할 정도로 눈깜짝할 새 일어났다.
1980년 결혼한 노씨는 택시기사로 일해 온 남편 최씨의 뒷바라지를 하며 두 딸을 어엿한 대학생으로 키워냈다. 하지만 최씨는 15년 전부터 술만 마시면 가족들에게 주먹을 휘둘렀고 흉기로 위협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심지어 딸들이 말대꾸를 했다거나 귀를 뚫었다는 이유로 침을 뱉거나 매질을 가하기도 했다.
가정폭력을 참다 못한 노씨의 신고로 최씨는 2년 전 구속까지 됐지만 가족들이 다시 탄원서를 내는 바람에 접근금지명령만 받고 풀려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일로 앙심을 품은 최씨의 행패와 폭력은 더 심해졌고 이 때마다 가족들은 집 밖으로 피했다가 최씨가 잠이 든 뒤에야 들어오는 일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노씨는 경찰에서 "우리 가족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뿐, 남편을 죽일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라고 말을 잇지 못했다. 경찰은 이날 노씨에 대해 살인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김명수기자 lece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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