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이 불면 병원마다 독감 예방백신 접종을 권장하는 플래카드 등이 나붙는다. 하지만 선뜻 내키지 않는다. 짬을 내기도 힘들고 왠지 주사라면 얼굴부터 찡그리게 된다.그런데 수년내에 이런 수고를 덜게될 것 같다. 병원에 가지 않고도 토마토나 시금치, 당근 등 과일이나 야채를 먹으면 독감을 예방할 수 있게된다는 얘기다. 나아가 과일이나 채소를 먹기만 하면 에이즈, B형 간염, 자궁경부암 등의 질병을 예방하게 되는 날도 머지않았다는 전망도 나온다. 바야흐로 백신을 접종하지 않고 먹는 '먹는 백신(edible vaccine)시대'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먹는 백신이란 식물을 먹거나 이를 가공해 이용함으로써 특정 질병에 대한 백신효과를 내도록 하는 것으로 일종의 '먹는 예방주사'다.
먹는 백신으로
주사를 맞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어렸을 적 줄을 서서 예방접종을 기다리며 느꼈던 공포감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반면 유독 아이들이 좋아하는 예방접종이 있다. 바로 샌드 과자 위에 살짝 뿌려주던 소아마비 예방접종이다.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생물학과 찰스 안첸 교수는 1990년 태국 방콕의 선상시장을 거닐다가 우는 아이를 바나나 한 조각으로 달래는 엄마를 보고 '만일 바나나가 아이들을 질병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작용을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세계 각국에서는 지난 10여년 동안 이 '허황된' 상상을 가시화하려는 연구가 진행 중이다.
이 같은 연구는 안첸 교수의 '감자 백신'으로 첫 열매를 맺었다. 설사를 일으키는 E. 콜리균이 분비하는 단백질을 투여하면 강력한 면역력이 생긴다는 데에서 착안, 이 단백질을 만드는 유전자를 가진 '감자 백신'을 만든 것이다. 안첸 교수팀은 이 감자를 11명의 건강한 어른에게 하루 3번씩 3주에 걸쳐 먹인 결과, 10명에게서 강력한 면역반응이 나타났다. 연구팀은 "파상풍과 디프테리아, 백일해, B형 간염 등을 예방하는 먹는 백신도 가능할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다. 안첸 교수는 또한 B형 간염을 예방하는 '바나나 백신'도 개발했다.
뒤를 이어 미국 코넬대 보이스 톰슨 식물연구소 휴 메이슨 박사는 B형 간염을 예방하는 '감자 백신'을 개발했고 미국 마운트시나이의대 휴 샘슨 교수는 땅콩 알레르기를 예방할 수 있는 감자를 개발, 쥐 실험까지 마쳤다.
미국 토머스 제퍼슨대에서는 광견병을 예방하는 '담배 잎 백신'과, 시금치로 에이즈 바이러스 백신 원료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휴 메이슨 박사팀과 독일의 마틴 뮬러 박사팀이 자궁경부암 원인 유전자인 사람유두종 바이러스(HPV)를 가진 형질전환 식물을 만들었다. 독일 기센대 야파고리 이마니 박사팀도 B형 간염 백신을 만드는 당근을 개발, 임상 실험중이다.
어떻게 만드나?
먹는 백신은 식물에 기생하는 식물성 바이러스의 플라스미드(plasmid·운반체)에 원하는 유전인자(항원)를 집어넣는 방식으로 만든다. 먹는 백신은 소화기 내에서 산(酸)이나 효소에 의해 파괴되지 않은 채 체내에 흡수되는데 흡수된 뒤에는 기존 백신과 동일한 메커니즘으로 작용을 한다.
먹는 백신을 연구하는 이유는 주사로 맞는 백신보다 값싸게 생산할 수 있고, 먹기만 하면 되는 편리함 때문이다. 또 먹는 백신은 맞는 백신처럼 냉장 보관할 필요가 없고 멸균되지 않은 주사기를 통한 병의 전염도 피할 수 있다.
다만 먹는 백신을 어느 정도 먹어야 효과가 있는지 하는 여부와 유전자 조작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생기는 윤리적 문제 등이 풀어야 할 숙제가 적지 않다. 활발한 연구와 달리 '먹는 백신'이 상품화단계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다.
우리의 연구 현황?
국내에서는 (주)제노마인이 HPV에 대한 형질전환 식물을 개발, 우리나라와 미국에서 특허를 얻었다. 전북대 장용석 교수팀은 돼지의 설사병 원인 유전자인 PEDV를 상추와 감자 등의 식물에 넣어 이들 식물에서 발현된 단백질의 항원성을 확인해 동물실험을 하고 있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 김현순 박사팀은 노인성 치매(알츠하이머병)를 초기 단계에서 먹는 백신으로 예방하거나 치료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한림대 생물학과 한태진 교수팀은 토마토를 이용해 C형 간염 백신을 만드는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권대익기자 dkwon@hk.co.kr
<도움말=한국생명공학연구원 김현순 박사, 녹십자백신 김경호 개발실장>도움말=한국생명공학연구원>
■ 백신의 역사
1796년 에드워드 제너가 천연두 접종을 한 것이 백신의 효시이다. 제너는 우두종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의 고름에서 빼낸 물질을 다른 사람의 몸에 접종해 천연두를 예방한 것이다. 제너는 고름에서 빼낸 물질을 '소(cow)'라는 뜻의 라틴어 'vacca'에서 그 이름을 따 '백신(vaccine)'이라고 명명했다.
프랑스의 루이 파스퇴르는 1885년 '광견병 백신'을 개발했다.
백신의 종류는 항원(抗原)에 따라 세균을 이용한 세균백신, 바이러스를 이용한 바이러스백신, 알레르기 유발원을 이용한 알레르기 백신 등이 있다.
제너가 백신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낸 이후 지난 200여년 동안 9대 주요 질병(천연두, 디프테리아, 파상풍, 황열, 백일해, 소아마비, 홍역, 볼거리, 풍진)이 백신의 개발로 현저히 줄였다. 지금까지 모두 21종의 전염병 백신이 개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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