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모 위독! RH― O형 혈액 급구! 인천 XX병원."2001년 8월, 온라인게임 리니지의 한 서버 내 채팅 창에 이런 메시지가 떴다. 휴일에 당직 중이던 게임마스터는 게이머에게 전화를 걸어 사실을 확인하고, 다른 서버에도 이와 같은 내용을 올려 모든 리니지 이용자가 볼 수 있도록 했다. 다행스럽게도 그 메시지를 본 한 게이머가 급히 그 병원으로 달려가 헌혈, 산모는 무사히 출산을 하게 됐다.
온라인게임 운영자, 게임마스터
국내 온라인게임 시장의 급속한 성장은 여러 가지 새로운 직업들을 탄생시켰다. 그중 하나가 온라인게임 운영자다. 엔씨소프트는 지난 5년 동안 리니지를 서비스하면서 이러한 운영 시스템을 계속 체계화해 왔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각 서버에 대한 운영 책임자인 게임마스터, 약칭 'GM'이다. 일반 기업의 고객 센터 직원들과 GM의 가장 큰 차이는 '세계를 관리한다'는데 있다. GM은 단순히 고객의 불만을 접수해 처리하는 사람이 아니다. 가상 세계의 질서를 잡기 위해 범죄자를 처벌하고 게임 내 경제가 제대로 돌아갈 수 있도록 통화량의 흐름을 살피며 게임 속에서 결혼식, 장례식 등을 치르는 등 다양한 행사를 열기도 한다.
리니지는 현재 41개의 정규 서버를 운영하고 있어 모두 41명의 GM이 일하고 있다. 1999년 입사한 2기 GM 기유정(30)씨는 현역 중에서는 최고참에 속한다. "이미 체계가 갖춰진 회사보다 무언가 새롭게 만들어 나가는 회사에 도전해보고 싶었다"는 그는 원래 게임에 대해 잘 모르고 입사했지만, 일단 입사한 이후로 리니지의 운영을 맡으면서 열성 게이머가 됐다.
10대 이용자가 많은 서버의 GM인 김지혜(28)씨는 팬클럽까지 거느린 인기 GM. 끈질기게 연애 편지를 보내는 15살 연하의 열성 팬 때문에 팬클럽 게시판에 기혼자라는 사실을 털어놓기까지 했다. 원래 리눅스 관련 업체에서 일했지만 '리니지 폐인'을 자칭할 정도로 리니지를 재미있게 하다가 엔씨소프트에 발을 들이밀었다고 한다. 올해 1월에 입사한 막내 김세연(28)씨는 전혀 다른 일을 하다 업종을 바꾼 경우다.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M사의 에어컨 연구실에서 설계를 담당했으나 게임을 너무 좋아해 연봉이 상대적으로 낮은데도 GM에 지원했다. 이렇게 GM팀원이 모두 게임을 정말 사랑하고 즐기기 때문에 다른 온라인게임 회사의 운영팀 팀장으로 스카우트된 초창기 멤버를 제외하면 이직한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한다.
다사다난 GM의 24시
GM은 고객의 불만 사항이나 건의 사항을 접수, 해당 부서에 알려주기도 하지만 이메일로 사기 등 신고가 들어오면 계정을 정지시키는 등 제재를 가하기도 하기 때문에 이용자들로부터 사랑과 원망을 함께 받는다. 당연히 다양한 에피소드를 겪을 수밖에 없다.
기씨는 아직도 입사한 지 2개월 되던 때 겪었던 황당한 일을 기억한다. 한 게이머가 "영자(운영자)님 아템(아이템) 좀 주세여∼"라며 들어주기 어려운부탁을 계속했다. 기씨가 계속 그럴 수 없다고 거절하자 그 게이머는 계속 거절하면 자살하겠다며 협박을 하기 시작했다. 오싹해진 기씨에게 게이머는 "저 지금 죽으러 가요", "바다가 보여요" 하면서 섬뜩한 메시지를 계속 보내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란 기씨는 그 이용자를 말리려고 '순간 이동' 기능을 이용해 그 게이머의 캐릭터를 찾아갔다. 게임 속 바닷가였던 그곳에는 어이없게도 신발과 갑옷, 무기 등이 차례로 놓여져 있었다. 마치 자살한 것처럼 게임 속에서 흉내를 내며 GM을 놀린 것이었다.
'수배 계정'에 얽힌 일화도 있다. 리니지가 200만명이 즐기는 국민게임이 된 후 엔씨소프트에는 경찰이나 군 등 수사기관에서 범죄자나 탈영병을 찾아달라는 요청이 자주 들어오는데, 이렇게 수색 대상이 된 이용자를 엔씨소프트 직원들은 '수배 계정'이라 부른다. 리니지를 즐기는 사람들은 어디에 도피해 있더라도 PC방 등에서 반드시 접속하기 마련. 수배계정으로 등록된 사람이 접속하면 관리자 모니터에 어디에서 접속했다는 정보가 뜬다. "한번은 국내 굴지의 기업인 S사에서 프로젝트에 꼭 필요한 연구원이 잠수했다며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은 적도 있어요." 실제 그 연구원의 위치를 추적, 찾아낸 결과, 며칠 동안 게임에 빠져 회사에 출근하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고 기씨는 말했다.
5년의 결코 짧지 않은 서비스 기간 GM들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리니지 플레이어들과 함께 한 행사다. 지난해 12월에는 100쌍의 리니지 가족들과 캠프를 다녀왔고, 올해 4∼5월에는 최초로 전국 6개 도시 순회 간담회를 열었다. 김씨는 "10대부터 50대까지 정말 다양한 리니지 플레이어 분들이랑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며 "과일 등 지역 특산물을 선물로 준 아주머니도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직도 일부 게이머들에게 GM은 증오의 대상이다. 다른 사람의 아이디를 도용하거나 아이템 사기 등을 벌이는 경우 가차없이 계정을 정지해 버리기 때문. "실수였다" "모르고 그랬다" 며 선처를 호소해도 대부분 복구시켜 주지 않는다.
GM들은 "안타까울 때도 있지만 이러한 행위는 약관에 따라 엄정히 처벌해야만 게임 속 질서가 지켜지고 선의의 피해자가 생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플레이어들에게 "게임은 게임일 뿐이니 아이템 매매나 사기 등을 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최진주기자 parisco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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