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형 지음 까치 발행·1만2,000원
"콜럼버스는 인류 사상 최대의 학살 원흉이다. 그가 아메리카 대륙에 처음 상륙한 1492년 당시 1억 명이던 원주민이 그 후 불과 150년 만에 300만 명으로 줄었다. 정복자들은 10분에 1명 꼴로 원주민을 죽인 셈이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상륙을 기념하는 올해 '콜럼버스의 날'(10월12일) 베네수엘라 대통령 우고 차베스는 "중남미인들이 콜럼버스의 날을 기리는 것은 치욕"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지난해 이 날을 '원주민 저항의 날'로 바꾸는 대통령령을 선포했다.
'콜럼버스가 서쪽으로 간 까닭은?'의 내용도 차베스 대통령의 발언과 같은 맥락이다. 남미 정치경제학이 전공인 저자 이성형(세종연구소 초빙 연구위원)은 차베스 대통령이 지적한 이 끔찍한 사건을 '인류사 최초의 제노사이드'(대량학살)라고 부른다. 정복자들이 역사적 개가라고 주장하는, 그러나 정복당한 자들에게는 눈물과 고통의 뿌리가 된 것이 어찌 신대륙 발견 뿐이랴.
이 책은 서구 중심으로 씌어져 온 세계사를 '정치적·지정학적으로 공정하게' 재해석하려는 시도다. 저자는 서구 중심주의가 발명하고 다져온 거짓 신화를 파헤치고, 그들이 세계사의 주변부로 밀어버린 아시아와 남미를 재평가한다. 서구라는 중심을 해체해서 진정으로 '세계사다운 세계사'를 지향하는 이런 접근법을 그는 여러 선율이 동시 진행하는 '대위법'에 비유한다. 따라서 이 책은 탈 중심, 탈 식민주의적 글쓰기로 나아간다.
그러나 신화의 힘은 끈질기다. 우리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배웠다. 콜럼버스에 앞서 아시아인들이 일찌감치 신대륙을 밟았고, 그 후예들이 잉카·아스텍·마야 등 훌륭한 문명으로 콜럼버스 일행을 놀라게 했는데도 말이다. 저자는 "콜럼버스의 공로는 신대륙을 '인도'라고 우기고 이 약속의 땅을 스페인 군주의 땅으로 만든 것"이라고 비꼰다.
자만심에 가득 찬 유럽인들이 '발명'한 역사에서 지은이는 거짓 신화의 목록을 본다. 예컨대 유럽인들이 대항해 시대를 열었다는 주장도 틀린 것이다. 그보다 앞서 중국의 명 나라 때 환관 정화(1371∼1435?)의 대함대가 무려 일곱 차례에 걸쳐 동남아와 인도양을 샅샅이 누비고 멀리 아프리카의 관문인 호르무즈 해협까지 갔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뤄져 있다. 1부는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우기는 유럽의 '미몽'을 질타하고, 신대륙 정복 과정에서 벌어진 온갖 협잡과 원주민의 비극을 고발한다. 2부에서는 서구 중심 역사관의 오류를 지적하고 탈 식민주의 글쓰기를 소개한다. 마지막 3∼7부는 신대륙에서 유럽과 아시아로 흘러간 커피·설탕·감자·옥수수·은 등 물산과 무역의 이야기를 통해 세계화의 과거와 현재, 그 빛과 그림자를 조명한다.
2부에서 소개하는 '정복하는 글쓰기'의 사례는 다양하다. 무인도에 표착한 영국 남자가 야만 상태의 원주민을 하인으로 거느리고 살아가는 내용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 아프리카·아메리카인을 '죄스러운 미성숙' 상태에 있다고 봤던 칸트, "세계사의 종착역은 유럽이고 시발점은 아시아"라며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는 아예 제외했던 헤겔…. 이에 맞서는 탈 식민주의 글쓰기의 사례로 아르헨티나 철학자 엔리케 두셀을 내세운다. 두셀은 신대륙을 발견했다는 미몽이 유럽 중심주의의 뿌리라고 지적한다.
3부는 신대륙에서 건너간 상품의 교역에 관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유럽인들이 세계 무역의 전면에 나선 16세기 이전에 이미 중국이 주도하는 세계시장이 형성돼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시아가 세계체제에 뒤늦게 편입됐다는, 널리 퍼진 편견을 바로잡는 이 같은 지적은 경제사가 앙드레 군더 프랑크가 그의 역저 '리오리엔트'에서 조목조목 밝혀낸 바이기도 하다. 저자의 고찰은 과거사에 그치지 않고, 오늘에까지 닿는다. 서구 중심 세계화의 부당한 횡포에 맞서는 현재진행형 혁명으로 그는 신자유주의에 맞서 봉기한 멕시코 원주민 농민들의 사파티스타 항쟁을 든다. 3부는 다소 낯설고 딱딱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지은이는 신대륙 원산 각종 작물의 문화사를 양념처럼 집어넣어 맛을 내고 있다. 이를테면 커피광 처녀의 결혼 소동을 다룬 바흐의 음악 '커피 칸타타'를 통해 커피가 유럽에 끼친 영향을 보여주는 식이다.
저자는 편파적이고 왜곡된 유럽 중심의 세계사를 철저히 해체할 것을 거듭 강조한다. 그러나 그 뿌리는 이미 우리 삶 깊숙이 파고든 상태다. 그런 점에서 탈 식민주의 역사해석과 글쓰기를 역설하는 이 책은 우리 모두의 반성을 요구한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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