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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남을 향하며 북을 바라보다

입력
2003.10.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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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엘 도르프만 지음·한기욱 옮김 창비 발행·1만5,000원

"나는 여기서 이 이야기를 해서는 안될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이야기를 하기로 한다. 1973년 9월11일. 칠레에서 쿠데타가 일어난 날, 그의 나라 군대가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에 대항해 일어난 날이다. 단 일주일 만에 3만여 명의 시민이 죽었을 때 아리엘 도르프만(61)은 칠레를 떠나야 했다. "과거의 어느 날, 난 죽었어야 하는데 죽지 않은 것이다." 죽음이 그의 삶 속에 들어와 목숨을 앗아가는 대신 그를 살아 남게 한 9월11일 아침에, 도르프만의 '남을 향하며 북을 바라보다'의 이야기는 시작됐다.

아리엘 도르프만은 파블로 네루다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잇는 라틴 아메리카 작가로 꼽힌다. 소설집 '우리집에 불났어'와 희곡 '죽음과 소녀' 등에서 역사의 폭력이 인간에게 남기는 잔인한 상처를 생생하게 증언했으며, 문화비평서 '도널드 덕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서 사랑스러운 만화의 가면을 쓴 미국 문화 제국주의의 야만을 짚었다. '남을 향하며 바라보다'는 회고록으로 이름을 붙였으되, 아옌데 대통령의 사회주의 정부가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무너지는 3개월 여를 돌아보는데 집중된다. 그도 그럴 것이 도르프만에게 그 혹독한 짧은 기간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지만 그 시간이 없었다면 그의 이야기는 없었을 날들이었다.

도르프만의 회고록은 '죽음을 다루는 장(章)'과 '삶과 언어를 다루는 장'이 교차한다. 그가 걸어온 길은 죽음과, 삶과 언어를 맞바꾸는 여정이었다.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두 살 때 미국으로 옮겨가선 미국 소년이 되려고 안간힘을 썼다. 매카시 바람으로 열두 살에 미국을 떠나 칠레로 가선 어린 몸에 물들어버린 아메리카니즘으로 고통스러웠다. 풍요로운 북쪽 나라(미국)의 언어가 편안해져서 가난한 남쪽 나라(칠레)의 언어를 익히는 것에 완강하게 저항했었다. 스페인어가 혀에 내려앉았고 아옌데 혁명에 참가했으며 미국 문화를 비판하는 반제국주의 지식인이 됐다. 도르프만은 "여러 해 동안 자신의 목구멍을 차지하려고 날뛰었던" 두 언어의 싸움을 들려준다. 그것은 북과 남이 뒤섞여 잡종이 돼버린 자신의 삶 얘기다.

아주 예전의 얘기를 담담하게 들려주는 것 같다. 칠레의 민중들에 섞여 반미 시위에 참가하던 순간에도, 고문의 고통으로 달콤한 햇볕 아래서도 덜덜 떠는 사람들을 만났던 날에도, 아내가 피노체트의 비밀요원들에게 붙잡혀갔을 때도 도르프만의 진술은 감정의 진폭이 거의 없다. 그는 이주와 망명의 상처를 극복하고, 자신이 걷는 죽음을 향한 여행이 삶의 여정의 다른 이름임을 고백할 만큼 평온해졌다. 도르프만은 지금 미국에 있으며 미국의 폭압을 고발하는 글을 쉬지않고 쓴다. 그는 언젠가 칠레로 돌아갈 것인지 혹은 영원히 방랑할 것인지에 대해 아직 답하지 못한다. 도르프만의 이야기 안에 들어있는 슬픔이 몸에 스미기까지 시간이 좀 걸린다. 그리고 그만큼 오래 남는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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