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 몽롱한 의식을 깨워줄 물 한 바가지가 필요할 때 나는 동양 고전을 펼친다. 논어, 노자, 장자, 한비자가 단골손님이었는데, 요즘은 자꾸 채근담에 손이 간다. 시인 조지훈 선생이 원작을 재편집해서 번역과 해설을 단 현암사 판을 본다. 1962년 초판이 나왔으니 나보다 형뻘이다.학생 때도 집에 있던 채근담을 뒤적거린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지루해 하면서 중간에 책을 놓아버리곤 했다. 서른 살 즈음에 조지훈 선생의 이 역주본을 만나고서야 '씹을수록 달고 향기로운' 채근담의 매력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책은 자연(自然), 도심(道心), 수성(修省), 섭세(涉世)의 네 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아직 세상살이에 미련이 많은 탓인지 섭세 편의 이야기들이 한층 간절하게 다가온다. 아마도 인생의 더욱 깊은 맛을 아는 나이가 되면, 뒤늦게 무릎을 치며 자연이나 도심 편의 가치를 깨닫게 될 터이다.
경제 불황은 수많은 사람들의 일상에 브레이크를 건다. 탄탄하게 설계해 두었다고 믿은 미래가 갑자기 흐트러져 버린다. 이때서야 우리는 비로소 질주를 멈추고 삶을 음미하게 된다. 일상의 관성에서 튕겨져 나왔을 때, 잊고 지냈던 철학적 물음들이 고개를 드는 것이다.
서점에 가면 이 같은 독자들을 향해 손짓하는 책들이 즐비하다. 자기계발서 또는 성공학 책이라고 불리는 이 책들은 대개 긍정적인 내면의 변화를 통해 마음의 평화와 사회적 성공을 한꺼번에 이루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하지만 책을 읽어도 각성의 시간은 오래 지속되지 않고, 몸에 붙은 질긴 습관의 힘에 다시금 굴복하곤 한다.
삶의 본질 문제와 진지하게 대결하는 것이 철학이라면, 그 세세한 전술을 따지는 것이 처세술이다. 제 아무리 '성공학'으로 승격시키고 깊이 있어 보이게 포장한다 해도 그것이 '현실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할 것인가'를 다루는 처세서인 이상, 사람을 본질적으로 바꾸어놓지는 못한다. 한때 머리를 자극하는 짜릿함 정도로는 뼛속 깊이 스며 있는 프로그램을 결코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의 새로운 계기를 마련해보기 위해 처세서를 찾는 독자가 있다면, 그 대신 채근담을 곁에 두고 꾸준히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물방울이 종이를 적시듯 몸으로 느껴지는 은근한 깨달음으로 하루하루 눈과 머리가 시원해지는 체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필훈·길벗이지톡 편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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