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 러시아와 수교한 이래 러시아 연주자의 방한은 잇따른 반면 우리 연주자의 러시아 공연은 극히 드물었다. 이런 가운데 한국을 대표하는 피아니스트 강충모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카펠라와 필하모니홀, 그리고 모스크바 음악원 초청으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만으로 독주회를 가져 화제가 됐다.올해 도시 창건 300주년을 맞아 연초부터 화려한 음악축제로 세계의 이목을 끈 '음악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 차이코프스키의 '비창' 교향곡이 초연됐던, 지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도시이기도 하다. 차이코프스키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바흐'는 어딘지 '코드'가 맞지 않을 것도 같다.
7일 저녁 7시 러시아 최고의 콘서트홀인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니아 말리홀. 18세기 중엽에 완공돼 1949년 필하모니협회에 소속돼 정식으로 문을 연 오랜 전통의 직사각형 공연장 상단의 샹들리에는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정갈한 꽃으로 장식된 무대로 강충모가 등장했다. '아리아'의 첫 음이 넉넉한 잔향을 타고 객석으로 흘렀다. 이미 5년 전부터 묵묵한 구도자의 모습으로 바흐를 향한 고행길을 걸어 온 강충모의 음악은 역시 머나먼 이국 땅에서도 그 빛을 잃지 않았다. 네 번째 변주의 순진무구한 동심은 스물다섯 번째 변주에서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고 마침내 '아리아 다 카포'로 긴 여정을 마쳤다.
"그의 음악에는 나름대로의 예술적 형상을 가진 억양이 있네요. 작품을 매우 흥미롭고 다양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습니다. 이 음악가가 우리 콘서트 홀에 와서 작품을 연주했다는 게 정말 기쁩니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음악학교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피아노과의 자고로프스카야 교수는 연주회 가 끝난 후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찬사를 쏟아냈다.
다음날 저녁 모스크바음악원 말리홀. 리히테르, 길렐스 등 숱한 거장들이 거쳐간 역사적인 무대다. 프로코피에프가 즐겨 앉았다는 자리에서는 거장의 숨결이 진하게 느껴졌다. 2층 객석까지 거의 빈자리가 없었다.
특히 20세기 최고의 바흐 전문가였던 타티아나 니콜라예바의 서거 10주기 기념 콘서트로 마련된 이날 연주회장엔 유난히 러시아 청중이 많았다. 장엄한 파이프 오르간을 배경으로 강충모는 전날보다 더 안정된 바흐를 만들어갔다. 70분이 넘는 대장정이 끝나자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난 청중은 끝없이 박수를 치며 떠날 줄 몰랐다.
공연을 주선한 모스크바음악원 교수인 피아니스트 미하일 페투호프는 감개무량한 표정이었다. "이 역사적인 순간은 영원히 우리 기억 속에 남을 것입니다."
/유혁준·경인방송FM PD·음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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