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10월23일 스페인의 첼리스트 파블로 카살스가 푸에르토리코의 수도 산후안에서 작고했다. 향년 97세. 20세기 전반을 기술하는 음악사가는 카살스라는 첼리스트를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코르토, 바이올리니스트 자크 티보와 자연스럽게 뭉뚱그려 거론할 것이다. 이들이 1905년 출범시킨 카살스 트리오는 조화로운 앙상블 속의 풍부하고 웅대한 표현으로 1930년대 초까지 클래식 관객들을 열광시켰다. 카살스는 이 프랑스인 동료들과 함께 파리 음악사범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카탈루냐 지방 벤드렐 출신의 카살스는 첼로의 시인으로 불린다. 20세기 첼로 연주법은 카살스를 통해 그 완미함을 얻었다. 첼로라는 악기가 20세기 연주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 것도 주로 카살스 덕이다. 고전파와 낭만파의 중요한 첼로곡들이 카살스의 손을 거쳐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카살스는 지휘자로도 활발히 움직였다. 그는 1919년 바르셀로나에서 카살스 관현악단을 설립해 이 악단을 이끌고 유럽과 아메리카 각지로 순회 공연을 다녔다.
1936년부터 세 해 동안 스페인 전역을 피로 물들인 내전이 파시스트의 승리로 끝나자, 카살스는 조국을 등지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프랑코 정권을 승인한 나라에서도 연주를 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에 머물렀던 카살스는 전쟁이 끝난 뒤 남프랑스 피레네산맥 기슭의 프라드에 정착했다. 산 하나만 넘으면 조국이었다. 그러나 그 곳에는 그가 받아들일 수 없는 정권이 버티고 있었다. 카살스는 프라드를 제2의 고향으로 삼았다. 그는 1950년 이 곳에서 바흐 200주기 기념 음악제를 연 이래 매년 여름 실내악 축제를 열었다. 이 프라드 음악제는 카살스가 죽은 뒤에도 그를 기리며 계속 이어지고 있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