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제2대 유리왕은 집권 22년째인 서기 3년 10월 도읍지를 졸본(卒本)에서 국내성으로 옮긴다. 지금 중국 행정구역으로 요녕성 환인(桓仁)이 졸본이다. 이곳은 변방이 가까워 적의 침입이 쉬운 곳이어서 방위상 문제가 제기되었다. 실제로 부여와 너무 거리가 가까워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곳이었다. 유리왕이 큰 아들 도절을 자기 손으로 죽게 한 곳이기도 해 민심이 이반된 것도 한 요인이었다. 이 때부터 장수왕이 도읍지를 평양으로 옮긴 427년까지 424년간 국내성은 고구려의 수도였다.■ 압록강 뗏목도시인 평안북도 만포 대안의 집안(集安)이 옛 국내성이다. 유적 유물로 보아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고구려 수도였던 역사적 사실과 무관한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애석한 일이다. 고구려 멸망 후 유민들은 30년 동안 국권회복 투쟁 끝에 발해를 세운다. 발해의 5경 15부 62주 가운데 국내성은 압록부 환주(桓州)란 이름을 갖게 된다. 그 뒤 발해가 멸망하고 금(金) 원(元) 명(明) 청(淸)으로 땅 주인이 바뀌면서 여러 이름으로 불리다가 청 말기에 집안(輯安)으로 바뀌고 1965년 '집안(集安)' 으로 첫 글자가 바뀌었다.
■ 여러 차례 이 곳을 답사한 고구려연구회 이사장 서길수 교수(서경대)는 집안이 세계 최대의 고분도시라고 단정한다. 그의 저서 <고구려역사유적 답사> 에 따르면 집안 일대에는 무려 12,358기의 고구려 고분이 있는데, 이 가운데 통구 지역에만 11,300기가 몰려 있다. 장수왕릉으로 추정되는 장군총을 비롯한 수 많은 왕릉들과, 고구려 사람들의 풍속과 일상생활을 보여주는 춤무덤 씨름무덤 같은 귀중한 유적이 여기에 모여 있다. 그 가운데서도 '동양의 피라미드'라 불리는 장군총의 위용은 고구려 사람들의 기상이 얼마나 씩씩했는지를 한 눈에 보여준다. 고구려역사유적>
■ 이 놀라운 집안의 유물을 중국 것으로 삼으려는 움직임이 있다. 고구려를 한(漢) 나라의 일개 지방정권으로 규정하려는 의도가 그것이다. 수만의 고구려 군사가 수 양제의 30만 대군을 물리친 살수대첩은 세계 전쟁사의 불가사의로 꼽힌다. 강대국 당이 초기 고구려 침공에 번번이 실패한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고구려 시대에 중국 대륙에서는 유비의 서한으로부터 당나라까지 35개 나라가 명멸하였다. 길게는 211년, 짧게는 20여년짜리 나라도 많았다. 그러나 고구려는 700년을 넘도록 중국 동북지방의 맹주로 군림했다. 지금 그 땅을 지배한다고 어떻게 이런 사실을 부정하려 하는지 어이가 없을 뿐이다.
/문창재 논설위원실장 cjmo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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