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무 안되는 것은 나 사람 못 되어서인가.' 한국 고고학·미술사학의 태두 삼불(三佛) 김원룡(金元龍·1922∼1993·사진) 선생은 1985년에 그린 한 대나무 그림에 이런 글을 붙였다. 그림이 뜻대로 안 되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문인화(文人畵)의 격조는 그것을 그린 사람의 인품과 그대로 이어짐을 가리킨 말이다. 11월14일은 그의 10주기. 삼불은 자신의 유해를 경기 연천군 전곡리 구석기 유적지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가 발굴한 전곡리 유적은 한반도에 전기 구석기문화가 존재했음을 입증했다. 평생을 흙에 담긴 역사를 연구하다가 흙으로 돌아가려 한 그의 모습을 각인해 주는 유언이었다.삼불의 이런 학자 정신,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券氣) 가득했던 생애를 다시 볼 수 있는 10주기 유작전 '삼불 김원룡 문인화' 전이 25일부터 11월16일까지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다. 그가 남긴 문인화 60여 점이 전시된다. 삼불은 나이 마흔이 넘어서까지 일간지 신춘문예에 응모한 '문학청년'이자 82년과 91년, 두 번 전시회를 연 문인화가이기도 했다. 82년 전시회에서 월전 장우성 화백은 삼불의 문인화에 대해 "이것이 진짜 동양화"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삼불의 문인화는 인물, 산수, 동물, 화조, 어해(魚蟹), 송죽란(松竹蘭)에 두루 걸쳐있지만 생활 속 자신의 모습을 그린 인물화에 그의 생각이 가장 잘 투영돼 있다. 79년 작 '당주대화(當酒對話)'는 잔을 들고 얼큰하게 취한 인물 주변에 '노래에 술로 대하고, 술에 노래로 대하다'는 한문을 적었다. 삼불의 문인화에는 '일배화(一杯畵)'라는 애칭이 있다. 스스로 생전에 "내 그림은 일배(一杯)하고 난 용기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말했듯 전문가이기보다는 여기(餘技)로서의 그림 그리기를 사랑했던 그의 태도가 분명하다.
제자인 안휘준 서울대 교수는 이번 전시회를 맞아 삼불의 문인화 세계를 본격 분석한 원고지 100여 장 분량의 논문에서 "선생의 그림은 괴로운 공부 끝에 즐거운 마음에서 그려진 것들이다. 술과 그림은 그에게 두 가지 호사였다. 이런 의미에서 선생의 그림은 그 분의 학문이 낳게 했다고 볼 수 있다"며 "즉흥성, 단순성, 담백성, 해학성이 넘치는 선생의 그림이야말로 전형적 문인화"라고 평했다. 집필 중에는 서재 밖으로 신음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는 삼불의 학문적 열정이 문인화 그리기를 통해 '풀린' 셈이다.
시서화(詩書畵)가 하나가 되는 그의 그림은 이처럼 삶의 열정 뒤에 드리운 허무를 토로한 것들이 많다. 85년 작 '하늘과 물 사이'에는 '석가의 열반을 뉘 보았노 예수의 부활을 뉘 보았노 하늘과 물 사이를 평생 흘러도 너도 나도 모르는 한치 앞에서 휘두르는 주먹은 무엇이 되고 움켜쥐는 돈주머니 어디에 쓰노'라고 썼다. 개구리를 그린 89년의 그림에서는 '有水則泳(유수즉영) 有土則步(유토즉보) 基行世如濯足之士(기행세여탁족지사)', 곧 '물이 있으면 헤엄치고 흙이 있으면 걸으니 그 행세함이 발을 씻는 선비와도 같다'고 했다. 기화기인(其畵其人), 그림이 곧 그것을 그린 사람을 드러낸다는 말을 절감케 하는 작품들이다. (02)720―1020
/하종오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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