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사회 안전망은 너무 성기게 짜여 있어 그물 사이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드는 사람들의 사연들이 매일같이 방송과 신문을 가득 채우고 있다.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어 사랑하는 딸의 산소 호흡기 전원을 꺼야 했던 아버지의 아픈 마음도 그가 살인혐의로 구속되었다는 짤막한 보도 하나로 잊혀진다. 도대체 국가는 어디에 있는지, 사회 안전망과 기초생활보장을 위한 공공영역의 틀을 제대로 세우는 것이 국가 본연의 임무인데도, 항상 돈이 없다는 타령만 되풀이할 뿐이다. 그렇다면 이라크 파병에 천문학적인 정부 돈을 쓰기로 한 결정은 어떻게 가능했을까.재정적 측면에서 우리나라 정부는 매우 나약하다. 대부분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의 공공재정 지출액이 국내총생산(GDP)의 40% 수준인데 비해 우리나라는 25%도 못된다. 이것은 조세저항을 넘어서지 못하는 정부의 나약성 때문이거나, 시장(市場)이 모든 것을 알아서 해결해주리라고 믿는 결과일 것이다.
아무튼 우리 정부는 만성적인 공공재정 부족을 하소연하는데, 문제는 정부가 정말 써야 할 곳에 돈을 쓰지 않는데 있다. 그 결과 무늬뿐인 사회기초생활 보장 수준과는 너무도 대비되게 많은 돈이 민간의 손에 의해 좌지우지 되면서 집값이 미친 듯이 뛰고, 엄청난 액수의 검은 돈이 정치권을 들락거리고, 17조원이 넘는 돈이 과외비로 흘러 들어가고 있다. 우리 사회에 '공개념'이라는 게 도대체 존재하기나 하는 것인가.
고등학교까지의 교육을 우리는 '보통교육'이라고 부른다. 누구나 받아야 할 사회 서비스의 한 부분이며, 그 성격도 민간재이기보다 공공재에 가깝다. 공공재는 당연히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 OECD 회원국들이 국가의 총 교육비 중 80% 이상을 공공재정으로 충당하고 있는 반면, 우리나라는 그 수준이 겨우 50% 정도 밖에 안된다. 중학교까지 100% 의무교육이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전체 중학교 가운데 국·공립 학교의 비율은 77%에 그친다.
고등학교의 경우는 더욱 놀랍게도 둘 중 하나가 사립학교이다. 한마디로 말해 반쪽짜리 공교육이다. 어려운 산수가 아니다. 국가가 고등학교 교육의 절반 밖에 책임지지 못하고 있으며, 나머지 반은 민간과 학부모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돈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자식교육을 국가에 의존했다가는 큰일 나겠다'는 인식이 국민들 사이에 팽배해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 하긴, 우리 역사를 통틀어 언제 한번 국가가 말 그대로 '공교육'을 존중해준 적이 있는가. 그 결과 다른 나라 사람들은 이상하게 보지만, 스스럼없이 자기 호주머니를 털어 교육비를 부담해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 오늘날 사교육비 문제는 사실상 국가가 방기한 공교육 부재에 대한 국민의 자구책인 것이다. 어차피 다들 자기 돈 내고 자식 공부 시켰으며, 과외비 좀 더 써서 속력을 내다보니 과열된 것이다.
이런 현상을 놓고 최근 한국은행 총재께서 '천민적 교육 시스템'이라고 말했다. 국민이 아니라 국가가 천민이라는 뜻으로 한 말이라고 믿는다. 보통교육을 개인의 사비용에 의존하도록 유도하면서 책임을 회피해 온 국가는 지난 50여 년간 순순히 소 팔고 쌈지 돈 털어서 국가가 못해온 교육에 자발적으로 투자해 온 국민에게 머리 숙여 사죄해야 한다. 그 사죄는 특히 공공 재정을 책임져온 분들의 몫이다.
여러 나라에서 평준화 정책을 쓰고 있지만 우리와 같은 문제들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국가가 교육을 책임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평준화 정책이 아니라 국가가 암암리에 학부모들로 하여금 '돈 쓰면서 공부하도록' 최면을 걸어 온데 있는 것이다. 이미 드라이브가 걸린 이상 평준화를 푼다고 해서 그 관성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한 숭 희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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