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4학년 때였다. 4·19가 일어난 1960년 이른 봄이었다. 새 학기 등록 마감이 다가 오는데 시골집에서는 소식이 없었다.청량리 우체국에 가서 전화를 걸었다. 시외전화를 신청해놓고 한 시간 남짓 기다리자 우체국 아저씨의 귀 익은 음성이 연결되었다. "저 삼리 사는 경식인데요, 우리집에 가서 할아버지 보고 등록금 낼 날짜가 다 됐다고 좀 전해주세요."
그 뒤 이틀을 기다려도 시골에서는 아무 소식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우체국 아저씨 얘기가 "얘, 이번에는 등록금을 장만하기가 어렵다고 하시더라." 그리고는 한마디 더 붙였다. "너희 어머니는 삽짝 밖에 까지 따라 나오면서 우시더라."
힘없이 전화를 끊고 기식하고 있는 송민호(宋敏鎬) 선생님 댁을 향해 경춘선 구름다리 위를 건너 오는데 마침 춘천서 청량리로 들어오는 기차가 화통에서 연기를 뿜으며 달려왔다. '이제 두 번만 더 등록하면 졸업을 하는데…' 순간적으로 구름다리에서 달리는 열차 위로 뛰어 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바로 그때 뒤에서 송선생님이 나를 보시더니 "어디 갔다 오는 길이야? 같이 들어가지"하면서 앞서 가셨다. "참, 내일이 신학기 등록 마감인데 시골에 좀 알아 봤어?" 마치 우체국에서의 통화 내용이라도 들으시고 묻는 것 같았다.
그 당시 나는 전농동의 송선생님 댁에 기식하고 있었다. 송선생님은 해방 직전 보성전문에 입학하여 고려대 국문과 1회로 졸업한 후 모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다. 어릴 때 우리 고향 문의(文義)에 사신적이 있어 내가 대학 2학년 되던 해 여름방학 때 문의에 여행차 들리셨었다.
그때 손자 하숙시키기가 어렵다는 할아버지의 말씀을 듣고는 자기집에 와서 다니라고 하여 그 댁에서 기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송선생님 뒤를 따라가며 나는 통화 내용을 말씀 드렸다. "이번 학기는 아무래도 휴학을 해야 할 것 같아요."
다음날 아침 열 시쯤 선생님이 같이 좀 나가자고 하였다. 손에는 자그마한 보퉁이를 들고 계셨다. 나는 영문도 모르는 채 선생님을 따라 나서 시내버스를 탔다. 종로 2가 파고다 공원 근처에서 내렸다. 선생님은 보자기에 싼 물건을 소중히 끼고 좌우를 살피시더니 전당포 간판이 붙은 건물을 찾아 들어가셨다. 보자기 속 물건은 그 당시 댁에서 가장 값비싼 귀중품으로 아끼던 독일제 카메라였다. 선생님은 미리 준비하였던 돈 봉투를 안 호주머니에서 꺼내시더니 부족했던 액수를 카메라 저당 잡힌 돈으로 채워서 나를 주며 "바로 이 길로 가서 등록하게, 오늘이 마지막 등록 마감날이야."
등록을 마치고 인촌 선생의 동상 옆 벤치에 앉아 아지랑이 핀 홍릉 뒷산을 바라보는 내 눈에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 내렸다. 지난 해 종합병원 영안실에서 평생을 고려대학교 강단에만 서 계시다가 돌아가신 선생님 영전에 엎드려 절을 올릴 때 그 해 봄 보퉁이를 들고 앞서 가시던 그 날의 선생님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메었다.
신 경 식 한나라당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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