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아직도 있나요?" 마흔을 넘긴 사람들에게 이명래고약 이야기를 꺼내면 거의 예외 없이 이런 반응을 보일 것 같다. 궁금증과 반가움이 뒤섞인 되물음이리라.종기(부스럼)는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 특히 어린이에게는 흔한 질병이었다. 영양부족과 위생불량의 달갑지 않은 부산물이었다. 값이 저렴한 이명래고약은 피부병의 만병통치약이나 다름 없었다. 노란 기름종이에 싸여 있는 까만 고약을 온기에 녹여 환부에 붙이면 종기의 고름은 쏙 빠지고 상처가 아물었다. 심지어 다래끼에도 잘 들었다. 그 시절 우리의 어머니들은 이명래고약을 갖고 무자격의사 노릇을 톡톡히 한 셈이다.
이명래고약은 지난 세기에 한국인이 개발한 신약 1호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 같다. 새 천년을 앞두고 99년 열린 '추억의 세기에서 꿈의 세기로―20세기 문명 회고와 전망전', 그 자리에서 이명래고약은 활명수와 전시돼 지난 세월에 대한 그리움을 자아냈다. 70년대 이후 항생제와 설파제 등에 자리를 내주고 한국인의 곁에서 점차 멀어져 갔지만 명맥은 유지하고 있다. 다만 그 맥박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 뿐이다.
이명래고약은 1906년 첫 선을 보였다. 프랑스인 드비즈신부의 도움으로 고약개발에 나선 이명래(李明來·1890∼1952)가 불과 열 여섯의 나이로 종기환자 치료를 시작했다. 그래서 이 해를 이명래고약의 효시로 삼는다.
이명래고약의 맥은 '명래제약'(주)과 '明來韓醫院(명래한의원)', 두 갈래로 전승되고 있다. 양측은 맥을 잇는 과정에서 정통성 문제를 놓고 오랫동안 갈등을 벌여왔다.
고인의 막내딸 이용재(李容載·83)여사가 운영하던 명래제약은 경영난을 겪다가 2002년 9월부터 생산을 중단했다. "시화공단에 부지를 잡아놓고 명래제약을 다시 시작하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국에서 우수의약품제조관리기준(KGMP) 등 요건을 갖춰야 한다며 허가를 미뤄 답답합니다."
고려대 의대 전신인 경성여의전을 졸업한 이 여사는 한때 을지로 3가에 부친의 세례명을 딴 요한의원을 개업하기도 했다. 고려대 총장을 역임한 헌법학자이자 정치인이었던 고(故) 유진오(兪鎭午)박사의 부인인 이여사는 56년 종로구 관철동에 명래제약을 세워 고약의 현대화와 기업화를 시도했다. 외아들 유종(兪淙·45)씨는 가업을 잇는 대신 음악인의 길을 택했다.
서대문구 충정로의 명래한의원은 한의사 임재형(林宰馨·60)원장이 운영한다. 임원장은 '이명래고약집'이라는 상호로 전통방식의 고약을 만든다. 종기환자를 치료하고 고약을 판다. 이명래의 사후 사위 이광진(李光眞)이 뒤를 이었고 이광진 마저 96년 세상을 떠나자 임 원장이 장인의 가업을 계승한 것이다.
"장인어른이 가업을 이으라고 권했을 때 고민도 많이 했습니다. 고약만 팔아서는 한의원운영에 도움이 되지 않거든요." 고약집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하다 보니 경제적으로 보탬이 되는 보약손님은 거의 없다. 경희대 한의대를 나온 임원장은 70년 이광진의 사위가 되면서 이명래고약과 인연을 맺는다. 임원장은 이제 또 다시 고민에 빠졌다. 두 아들 모두 한의사와는 거리가 먼 직업을 선택하는 바람에 대를 물려줄 사람을 아직 정하지 못하고 있다.
임원장이 제조하는 고약은 주로 3가지다. 이명래고약은 종창, 관절염, 류마티스, 유선염 등에 효과가 크다. 성고약은 이명래에게 고약제조법을 전수해준 드비즈신부의 한국이름(성일론·成一論)을 붙인 것으로 연고형태다. 새 조직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이 고약은 화상 동상 욕창 등 각종 피부질환에 처방된다. 홍고약은 아토피성피부염이나 알레르기성 피부질환에 좋다. 고약 1개의 값은 1,000원.
"이명래 이광진선생 생존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지금도 소문을 듣고 환자들이 꾸준히 찾아옵니다. " 임원장은 이명래고약을 약국이나 다른 곳에서는 일체 팔지 않는다고 덧붙인다.
제조법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 있다. 명래제약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다양한 재료가 들어가는 고약의 기본약재는 오행초와 가래나무다. 둘 다 소염과 항염작용이 탁월하다. 명약으로서 이명래고약의 가치를 더욱 높여준 것은 발근고(拔根膏)로 소나무의 뿌리를 태워 나오는 기름이 원료다.
이명래 방식의 고약제조 과정은 무척 까다롭다. 온도조절이 중요한데 보통 180도에서 250, 260도를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 찰진 고약이 나온다. 밥의 뜸을 들이듯 고약도 잘 조려야 하는 것이다. 찰진 고약은 피부에 달라붙지 않고 흔적 없이 잘 떨어진다.
"많은 환자를 대하다 보니 이명래고약의 응용범위는 더욱 넓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맥이 끊길 경우 한방 나름대로 영역을 넓혀온 외과와 피부과 분야의 훌륭한 치료방법이 사라지게 됩니다." 임원장은 뜻 있는 젊은 한의학도들의 동참과 관심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이기창 편집위원 lkc@hk.co.kr
도움말 김용범(소설가)
'이명래고약집에서 세 번 놀랐다. 첫째는 너무 불결했고 둘째는 치료비가 매우 쌌다. 셋째는 아주 잘 낫는다는 점이다.'
일본의 육군대좌(대령) 사사키는 발찌를 치료한 뒤 총독부기관지 경성일보에 그렇게 기고했다. '큰 발찌가 나면 관을 짜두라'고 할 만큼 일본인에게 목 뒤의 종기는 치명적이었다. 그런데 이명래고약으로 완치를 보았으니 사사키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명래고약은 충남 아산의 공세리성당에서 탄생했다. 공세리(貢稅里)라는 명칭은 조선시대 충청 서남부의 아산 서산 한산 청주 등 40개 고을에서 조세로 거둔 곡물 등을 보관하던 공세창이 있었던 데서 비롯됐다. 파리외방전교회의 드비즈신부는 1895년 공세창고를 성당으로 개조, 전교를 시작했다.
중국체재중 한의학을 배운 그는 의료·교육사업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고약을 만들어 환자치료에 활용한 그는 이명래에게 비법을 전수했다. 드비즈신부는 1930년까지 공세리에서 사목활동을 했다.
이명래는 1890년 서울에서 독실한 천주교 집안의 9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생활고 등의 이유로 아산군 인주면 공세리로 이주, 드비즈신부에 몸을 의탁했다. 잔심부름을 하며 고약제조법과 치료법을 배워나간 이명래는 거지들을 대상으로 자신이 개발한 고약의 효능을 실험하고 개선했다.
이명래는 오늘날에도 난치병으로 꼽히는 골수염 결핵성임파선염 관절염 만성호흡질환은 물론 온갖 종기에 효험이 뛰어난 처방을 개발했다. 고약은 많은 처방중 하나인데 화상 피부병 종기 관절염 항아리손님 볼거리 관절염 유선염 등 질병에 따라 처방하는 고약도 다르다.
공세리에서 풍부한 임상경험을 쌓은 이명래는 1920년 서울로 올라와 중림동에 고약집을 차렸다. 이명래의 중림동시대는 이렇게 시작된다.
"거의 매일 300∼400명의 환자가 몰려드는 바람에 아버지께서는 새벽미사를 마친 다음 오후까지 쉴새 없이 진료를 해야 했습니다." 딸 이용재여사의 회고다.
일본인에게는 절대로 면허를 받지 않겠다고 작정한 이명래는 미군정 시대에 비로소 의생면허증을 취득한다. 일제강점기에는 툭하면 위생검사에 걸렸고 그 때마다 벌금을 내거나 뒷돈을 주어 무마했다고 한다. 1944년 일제의 강제소개에 따라 평택 서정리의 친척집으로 옮긴 그는 광복 후 서울 애오개에 다시 고약집을 냈다. 지금의 종근당 자리였다. 1·4후퇴 때 서정리로 내려간 이명래는 52년 1월 술에 취해 잠에 든 뒤 세상을 떠난다.
이명래는 사별한 첫 부인에게서 딸 하나, 둘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딸 둘을 남겼다. 두 아들을 일찍 잃었기 때문에 사위 이광진에게 가업을 물려주었다. 보성전문 법과를 나온 이광진은 유진오의 손위 동서로 이명래의 사위가 되면서 한의학을 배웠다. 그리고 이명래고약의 충정로시대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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