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농에 대한 정부의 무관심은 90년대 이후까지도 계속됐다. 1992년 리우환경회담에 내가 유기농 현황과 관련한 자료를 들고 우리나라 NGO대표로 참석할 때까지도 정부는 NGO에 마지못해 이끌려 가는 정도였다. 인류의 미래와도 직결되는 지구환경을 걱정하는 전세계인의 모임인 리우회담에 대부분 국가에서는 대통령이 직접 참석했지만 우리나라는 총리를 정부대표로 파견할 정도였으니 유기농에 대한 정부의 인식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그러던 정부의 입장이 크게 바뀐 것은 김대중 정부 들어서다. 엄밀히 이야기하면 김성훈 농림부 장관이 들어선 이후부터 유기농에 대한 정부의 태도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크게 변화했다. 김 장관은 입각하기 전에 정농회와 경실련이 합쳐 만든 정농생협의 이사를 맡은 인연이 있어 사실 유기농법을 하던 정농회 등에서는 그의 입각에 기대를 걸었던 게 사실이다. 김 장관은 이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농림부 내에 친환경농업과를 만들었고 정농회를 비롯한 유기농 단체들이 외국의 선진 유기농현장을 견학하러 나가는 길에 금전적인 지원까지 아끼지 않았다. 특히 유기농을 하는 농가에 직접지원 방안을 마련해 3,000평 당 50만원씩 보조를 해주었다. 최근에는 지원금액이 74만원 정도로 늘어났다. 김 장관은 장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유기농 단체들과 쿠바같은 유기농 선진국을 방문하는 등 남다른 애정을 보여줬다.
유기농의 이런 사정으로 정농회 회원들은 곤경에 처했지만 한삶회공동체는 풀무원식품의 도움으로 그나마 사정이 다소 나았다. 무우나 배추 등의 1차 산물 판매에서 시작한 풀무원식품이 처음에는 공동체 농장의 생산물 판매로 도움을 줬고 나중에는 공동체에 두부와 콩나물 등의 농산물가공을 맡김으로써 살림에 큰 보탬이 됐다.
풀무원식품이 판매하던 콩나물과 두부는 당초 원주에 위탁공장을 두고 생산해 왔다. 그러다 위탁공장에서 약속을 어기고 국산콩이 아닌 수입콩을 섞은 사실이 드러나 우리 공동체 농장이 위탁생산을 넘겨받게 된 것이다. 위탁가공 자체가 공동체수입에 보탬이 됐는데 두부생산 공정에서 나오는 비지를 가축의 사료로 사용할 수 있어 일석이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양주로 옮기면서 크게 줄였던 축산을 늘려 양돈을 다시 시작했다.
위탁가공이 점차 늘어나면서 가장 골머리를 앓았던 것은 도토리묵 가공이었다. 공장건물이나 설비 등의 기본시설 이외에 도토리묵 공장에는 엄격한 폐수정화 시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도토리를 갈아서 전분을 만들 때 떫은 맛과 검은 색의 '탄닌'이라는 오염물질이 대량으로 나오는데 이를 정화하지 않고 그냥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풀무원식품에 '폐수가 한방울도 생기지 않도록 최고의 정화시설을 지어달라'고 주문했고 풀무원식품은 나의 의견을 받아들여 막대한 자금을 기꺼이 투자했다. 주변에서는 생산설비보다 부대시설인 정화설비가 더 훌륭하다며 배보다 배꼽이 큰 격이라고 빈정거리기도 했지만 환경문제 만큼은 풀무원식품이 나와 한마음이 됐기 때문에 위탁가공 관계를 오래 유지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한삶회공동체의 풀무원농장은 채소 원예 단지와 식품가공 공장, 미생물 발효공장, 축사 등을 갖춘 종합식품 생산단지로 변모했다. 농장의 규모와 범위가 확대되면서 공동체의 조직도 좀더 체계적으로 바뀔 필요가 있었다. 공동체의 상시 인구도 30∼40명이 됐기 때문에 기능별로 인력을 나눌 수가 있었다. 그래서 축산부와 채소부, 농사부 등으로 부서를 나눠 공동체 식구들을 배치하고 각 부서에는 부장을 두는 식으로 체계를 잡아갔다. 풀무원식품에서 농산물 위탁가공을 맡게 되면서 공동체는 현대적인 조직으로 발전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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