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린곁 봉선사의 여승 한 분이 찾아 온 것은 이장이 본격적으로 음악을 틀어댄 지 수삼일 뒤였다. 일년 열 두 달 농기계 소음 말고는 기계소리라고는 안 들리는 외진 마을 후미진 골짜기에서 듣도 보도 못한 서양 클래식이었으니, 영문이라도 알아야겠다는 심사였던 것. "처음엔 쩌어기 이사 온 교수님 집에서 전축을 크게 틀었나 싶더라는규." 스님이 그러니 뽕짝 리듬과는 종자부터 다른 음악에 대한 이웃의 반응이 뜨악했을 밖에. 아닌 게 아니라 주민들은, 논에 산모가 듣는 태교음악을 들려주기로 했다는 그의 설명에도 '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는 식이었다. 거기에 이골이 난 듯, 이장은 심드렁했다. 노인회장 조(72)씨 어른은 좋은 스피커 단 김에 테이프 '앵콜18번' 타이틀 곡이자, 그의 18번인 '장녹수'나 한 곡 빵빵하게 올려보라며 성화를 대기도 했다.충북 청원군 남이면 상발리 조추형(55) 이장의 저농약 '태교(胎敎)쌀' 농사는 그렇게 요란하게 시작됐다. "말들이 없지는 않았슈. 그래도 지금은 하루 서나 차례 두 시간씩 틀어대도 이해들을 혀 줘유. 또 워쩔뀨. 지가 대장인디유."
남이면이라면 고속국도 경부·중부선이 나뉘는 '남이 분기점'으로 낯 익은 지명이다. 만성 교통체증으로도 유명해, "남이만 지나면 괜찮다"는 식의 정 떨어지는 표현에 더러 거론되는 곳이다. 도로가 그 뿐이던가. 바로 아래께 대전―통영간 고속국도가 뚫렸고, 고속전철이 지난다. 중부권 사통팔달의 국도 17호선이 마을 복판을 관통하고, 2006년이면 면사무소 뒤통수를 스치는 당진―상주간 고속국도가 개통한다. 그 길들을 산지사방 실핏줄 같은 지방도가 잇고 있다. 결국 남이면은 도로면인 셈인데, 한 주민은 "좋은 땅 길바닥에 다 뺏기고, 남은 땅 걔우(겨우) 부쳐묵고 사는 신세"라고 했다. 31개 마을 2,500여 가구 주민 70%는 농사를 짓는데, 쌀 농사를 빼면 대부분 야채를 심어 청주 육거리 새벽시장에 나가 난전 장사를 한다. 길이 많으면 부(富)가 흩어지더라는 옛 사람들의 말은, 여기까지는, 옳은 말이다.
마을에 첫 혼수가구 도매업체가 들어선 게 1995년이다. 싼 땅값에 전국 물류 최적지라는 점에 착안한 것인데, 입 빠른 도매상들을 통해 소문이 퍼지면서 그 새 입주업체가 70여 곳으로 늘었다. 이 길 밀리면 저 길 타는 식의 우회로가 많아 제주도만 제외하면 전국 어디나 2시간 내에 닿는다는 곳이다. 한 상인은 지금 짓고있는 건물들 입주가 끝나는 내년 초면 100곳을 넘어서, 전국 최대 혼수가구단지가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업체들은 약속이나 한 듯 봉무산(鳳舞山·343m) 기슭이 시작되고 끝나는 국도변 2.4㎞구간에 나란히 자리를 텄다. 자고로 봉황이라는 게 황제가 나기 전에 나타나는 영물이어서, 귀한 자손을 염원하는 이들은 으레 원앙금침·자개 농에 비무(飛舞) 봉황을 아로새겼다. 볼품없는 산 이름에 '鳳' 이 든 것도, 마을 이름(척산리)에 자(尺)가 든 것도, 훗날 혼수·가구 단지의 발흥을 예견했던 선인의 뜻이라는 게 주민들의 믿음이다. "혼수 가구사업 하라고 봉무고, 대팻밥 실밥이 산처럼 쌓이라고 척산이유. 잘 될뀨. 잘 될 수 밖에 없슈." 딴은, 잘 돼왔고 잘 되고 있으니까 업체들이 몰려드는 것일 게다. 단지에는 지난 해에만 서른 곳 남짓이 새로 입주했다. "혼례와 관련된 업체는 금은방 한 종류 빼고는 다 있습니다. 조만간 토털 웨딩타운이 될 겁니다." 입주 원년 멤버이자, 혼수가구거리발전협의회 회장인 정경완(45)씨의 기대이자 포부다.
태교쌀은 농촌과 혼수·가구타운의 결합모델로, 연초 부임한 정연철(49) 면장이 아이디어를 냈다. 아이를 잉태해서 좋은 것만 듣고 말하고 먹는 모성으로 벼를 심고 가꿔 그 쌀을 예비 부부들에게 나눠주자는 것. 시배지는 면내에서 가장 후미져, 소음이 차단된 상발리 조 이장네 고래실 논 3,000평으로 정했다. 태교쌀은 종자부터 지장수와 참나무숯으로 소독, 침종(쌀을 물에 담가 불리는 것) 과정부터 발아·생육기간 내내 태교음악을 듣고 자랐다. 350만원을 들여 11개 스피커를 여섯배미 논 둘레에 설치했다. 하우스 재배에 주로 이용되는 그린음악에다 탤런트 최수종이 임신한 아내에게 들려줬다는 태교음반(정 면장 추천)을 포함시켰고, 청원군수가 권한 가수 김도향의 명상음반까지가 레퍼토리다. 평생 가야 안 뵈던 청둥오리가 100여 마리씩 날아들어 봄부터 여름까지 새끼를 쳐가며 '벼 알'을 빼먹었고, 약을 거의 안쳐 '벌거지'가 더 꼬였지만 소출은 고만고만한 게, 조 이장은 신기하다고 했다. "벼 패는 것도 같은 종자를 쓴 다른 논보다 사흘이 빨랐슈. 이만 허믄 쌀로 70개(80㎏)는 나올 것 가튜." 태교쌀은 전량 발전협의회가 정부수매가보다 1,000원(산물벼 40㎏기준) 더 얹어 매입, 500g씩 소포장해 고객들에게 나눠줄 예정이다. 정 면장은 "내년에는 6,000평으로 늘려 전량 비매품으로 계약재배한 뒤 반응이 좋으면 2005년부터 상업재배를 본격화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면은 지난 해 중소기업청 정보화촉진지구에 지정돼 4억원을 타왔다. 그 돈으로 종합 사이버 쇼핑몰을 구축하는 중이다. 군 특화사업거리 지정 예산으로는 국도와 고속도로에서 한 눈에 볼 수 있는 외천리에 20m높이의 상징탑을 세울 참이다. 정 면장은 혼수가구거리 2.4㎞구간을 '황금길'로 명명, 도로에 황금빛 투스콘을 깔기로 하고, 이를 전국 최초 면 단위 상징 로고에 넣어 태교쌀과 함께 상표특허를 출원했다. 농민들과 사업주, 면 공무원들은 생후 10년보다 태중 열 달이 중요하다는 점과 태교쌀 농심을 담은 리플릿을 제작·배포하고, 종업원 교육도 실시할 예정이다. 태교쌀 성분검사가 나오면 그것도 선전할 참이다.
길이 뚫리면 민심이 흩어진다는 옛 말은, 남이면의 경우만 본다면, 거짓말이다.
/청원=최윤필기자 walden@hk.co.kr
사진 김주성기자
● 남이면장 정연철씨
정연철(사진) 면장은 '경제면장'으로 통한다. D물산 박모(38) 사장은 "가게에 들러도 공짜 차 마시는 예 없이 꼭 조언을 하고 아이디어를 준다"고 했다. 혼수가구거리 조성계획부터 태교쌀, 황금길에 이르기까지 거의 대부분이 그의 생각에서 비롯됐고, 주민들과의 대화를 통해 살이 붙은 것들이다. 하지만 그는 모두가 주민들의 생각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라고 사양했고, 주민들은 "저런 분(면장)을 청와대로 보내디려야 한다"고 했다. "아, 안뒤야. 오래 붙잡고 있어야 허는디 뭔 말이여"라고도 했다.
정작 정 면장 본인은 '농사면장'이고 싶다고 했다. 농민의 정성을 기업이 사주고, 기업은 소비자에게 그 농심을 함께 전하는 선순환 구조가 쌀 개방을 이기고, 다 함께 살 수 있는 '윈윈의 길'이라고, 면장으로서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그는 믿는다. "추울 때 함께 춥고, 더울 때 함께 더워하며 사람과 함께 자라는 농산물, 그게 신토불이 아닙니까." 사람과 우뢰풍로 함께 맞으며 자란 것이라야 기(氣)가, 사이클이 맞는다고 그는 말했다. 부부도 오래 사랑하면 닮아 가듯이 말이다.
1975년 지적직 9급으로 공복생활을 시작, 연초 5급으로 승진한 그의 첫 임지가 남이면이다. 79년 전산직으로 옮겨 시종 농업정보화 업무를 보면서 20년 넘게 농민들과 접촉하는 동안 농사 아이디어도 얻고, 농민들의 마음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됐다고 그는 말했다. 그간 공감한 농촌의 정서를 남이면의 입지와 조화시켜 행정으로 풀어 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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