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율 사건으로 우리 사회가 지나치게 시끄럽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다. 송두율이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냐, 법대로 처리하면 그만이지 왜 그렇게 말들이 많으냐는 것이다.물론 그런 점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사건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사건은 우리가 지난 시대의 상처를 어떻게 극복하고 정리할 것이냐를 가름하는 분수령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송두율씨에 대한 환상이 이 사건을 부풀렸다. 송씨 자신이 만들어낸 드라마틱한 '경계인 스토리'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때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상은 깨졌다. 그 스토리는 상당 부분 거짓말임이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중요하다. 그의 생은 인간의 나약함과 비겁함 까지를 포함하는 분단시대의 비극으로 채워져 있다. 나약함과 비겁함은 분단시대를 살아내는 하나의 방편이기도 했다. 우리는 지금 이중삼중으로 '변절'한 한 지식인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지난 9월22일 37년 만에 귀국한 그는 '영웅'으로 돌아오고자 했다. 그가 만일 분단의 풍랑에 지친 한 전향인(轉向人)으로 돌아왔다면 문제는 보다 간단했을 것이다. 이제 남북관계가 새 시대를 열었으므로 그는 고향인 이 땅에서 안식처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귀국한지 한 달이 가까워 오도록 조금씩 말을 바꾸며 애매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추방만은 말아 달라. 나는 이 땅에서 살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왜 북이 아닌 남에서 살고자 하는지 설명하지 않았다. 귀국 23일만에 북한 노동당 탈당, 독일 국적 포기, 한국 국적취득과 헌법 준수 등을 서약했지만, 아직 '전향'이란 말은 쓰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선택이다. 지식인의 거짓말이 역겹고 실망스럽지만 우리가 안타까워 할 일은 아니다. 정말 안타까운 것은 멍석을 깔아놓고 그가 석고대죄하기를 기다리는 우리 측의 태도다. 용서해 줄게 참회해 다오, 관용을 베풀 테니 전향해 다오, 조금만 더 수준을 높여 반성해 다오… 하는 식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13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세상이 많이 바뀌고 있다. 민족간의 화해와 포용을 말하는 시대가 왔다. 송두율씨 문제는 엄격한 법적 처벌도 중요하지만 한국사회의 폭과 여유와 포용력을 전세계에 보여주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재신임 문제를 설명하는 국회 연설에서 원고에도 없었다는 송두율 사건이 왜 튀어 나왔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대통령의 발언으로는 참으로 부적절하고 대책없이 낭만적이기 까지 하다. 거짓말이 잇달아 드러나는 바람에 송씨를 성원하던 사람들까지 난감해 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무슨 온정론인가.
여유와 포용력을 세계에 보여주는 것은 좋은데 국내 사정은 어찌 할 셈인가. 그 동안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형당한 사람들을 살려낼 수는 없다 해도 감옥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인가. 여유와 포용력을 선별적으로 또는 우선적으로 송씨에게만 베풀자는 건가. 무엇보다도 검찰이 수사중인 사건에 대해 대통령이 이런 식으로 말한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검찰의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송씨의 발언이 조금씩 변화한 것은 검찰의 '지침'을 따른 것이다. 검찰은 송씨의 문건제출과 기자회견이 있을 때 마다 그 정도 반성으로는 안 된다, 참회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 선처의 전제 조건인 전향의사로 보기 어렵다… 등등의 언급을 해 왔고 송씨는 마지못해 반성의 수위를 높여 왔다. 그는 앞으로 '경계인'이란 말을 쓰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아직 '회색인'에 머물고 있다.
검찰이 송씨의 참회를 요구하고 힌트를 주면서 기다리는 이유는 그를 선처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법무장관도 대통령도 선처에 무게를 둔 발언을 하고 있다. 법에 따라 어떤 처벌을 받든 그것은 송씨의 선택인데 왜 미리 멍석을 깔아주고 기다려야 하나.
나는 같은 연배인 송씨가 입은 분단의 상처를 이해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대통령이나 정부가 보인 태도는 분명히 잘못됐다. 송씨로 인해 우리 사회의 법 감정과 균형에 금이 가서는 안 된다.
/본사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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