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한번 내리더니 기온이 뚝 떨어졌습니다. 변함없는 계절이 순환에 새삼 놀랍니다. 옷 속을 뚫고 들어오는 찬 기운이 아주 서늘하게 느껴집니다. 단풍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하는 듯 싶더니 강원 산간에는 벌써 얼음이 얼었다죠. 마음도 일도 겨울을 맞을 준비가 돼 있지 않아 조급한 마음이 앞섭니다.닥쳐올 겨울에 대한 걱정은 숲 속 생물도 우리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가을에 보이는 단풍, 낙엽, 결실 등과 같은 현상이 모두 생물들의 걱정을 표현하는 형태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지요. 겨울없이 지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너무 가혹하지만 않다면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겨울 추위는 죽을 것은 죽고, 살아남을 것은 살아 남아 전체적으로 자연의 균형을 만드는 한 메커니즘일 수 있으니까요.
겨울이 없다면, 아시아를 강타한 '겨울연가'와 같은 드라마가 탄생하지 못하는 섭섭함 말고도 문제될 일이 많습니다. 당장 해충들이 너무 번성해 숲 속의 나무나 가로수는 물론 우리 식량까지 위협할 수 있지요.
단순히 생각해 날씨가 따뜻하다면 식물이 생장하기에 적합해 언제나 초록 잎과 꽃들을 만날 수 있겠구나 싶지만 그렇지도 않습니다. 적어도 겨울추위를 겪으면서 적응했던 진정한 온대식물들은 따뜻한 열대지방에 옮겨놓으면 잘 자라지 않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따뜻한 나라에 살던 식물들은 또 그 환경에 적응하는 메커니즘이 다르니 별개이지만요.
봄에 수선화나 아마릴리스 같은 식물을 화분에 심어 꽃을 잘 감상했는데, 이를 그냥 따뜻한 아파트 안에 두면 다시 꽃이 잘 피지 않거나 심지어 한번 시든 잎이 다시 올라오지 않는 것을 경험한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사과나 배와 같은 온대 과일을 온실에서 키운다면 사철내내 생산이 잘 될까요? 처음에는 쑥 클지 모르지만 이내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어려워집니다.
봄이 돼 눈(芽)이 터지고 새싹을 만들며 혹은 꽃을 피우며 식물이 자라나는 데는 따뜻한 봄 기온뿐 아니라 겨울추위라는 자극이 반드시 필요하지요. 이것이 식물들이 스스로의 때가 왔음을 인지하는 방법입니다.
모진 겨울을 잘 견디는 것은 당연히 받을 어려움이 오지 말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추위에도 잘 견딜 수 있을 튼튼한 자신을 만드는 일이며 이를 미리 준비하는 일입니다. 나무들은 지금 여린 싹을 쌀 단단한 껍질을 만들고, 추위가 스며들 약한 곳을 차단하기 위해 낙엽을 떨구고, 얼지 않도록 수분농도를 낮추고 당분 농도를 높이는 등 바쁘게 움직입니다. 이러한 이치가 어디 식물뿐이겠습니까. 사람살이와 나아가 기업과 나라도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내년 봄에 아름다운 수선화 꽃을 보고싶다면 잎이 시들어 버린 뿌리를 신문지 같은 것에 싸서 서늘하고 어두운 곳에 보관해 주십시오. 그 어려운 시간이 자극이 돼 찬란한 봄을 맞이 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이 유 미 국립수목원 연구관 ymlee99 @fo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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