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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

입력
2003.10.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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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 지음 문학사상사 발행·5,000원

'식구들 모이는 날이면 어머니가 펼치시던 두레밥상./ 둥글게 둥글게 제비새끼처럼 앉아/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밥숟가락 높이 들고/ 골고루 나눠주시는 고기반찬 착하게 받아먹고 싶다.'('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에서).

어렸을 적 밥상이 둥글었다는 것을 우리는 자라면서 잊어버리고 살아왔다. 한 끼 밥을 차지하려고, 밥그릇을 지키려고 날카로운 발톱을 세웠고, 저 혼자 살겠다고 남의 밥상을 엎기도 했다. '밥상에서 밀리면 벼랑으로 밀리는' 정글 속에서 우리는 버둥버둥 악다구니를 쓰며 살고 있다.

시인 정일근(45)씨는 5년 전 뇌종양 선고를 받았다. 늘 움직이고 사람과 섞이길 좋아하던 그가 두 달을 살지 못하리라는 것이었다. 뇌수술을 받고 극적으로 회복된 뒤에 그는 시를 다시 만났다. 울산의 한적한 마을에 자리잡았다. 그는 매일 그 마을에 있는 집 마당으로 출근한다. 자연이 불러주는 시를 '받아쓰기' 한다. 그의 일곱번째 시집 '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은 그 받아쓰기 모음이다. '감나무 새잎들이 햇살로 세수하고 나와/ 눈부신 신의 말씀 전하는 아침부터/ 무논에 개구리 왁자그르르 울어/ 신이 묵상에 잠기는 저녁까지/ 나는 이제 막 글을 배운 초등학교 1학년처럼/ 연필 끝에 침을 발라 열심히 받아쓰고 있다.'('자연 받아쓰기'에서).

오며 가며 만난 들꽃 이름이 '쑥부쟁이'라는 것을 알고는 사랑하게 됐다. '이름을 알면 보이고 이름 부르다 보면 사랑하느니/ 사랑하는 눈길 감추지 않고 바라보면, 모든 꽃송이/ 꽃잎 낱낱이 셀 수 있을 것처럼 뜨겁게 선명해진다'('쑥부쟁이 사랑'에서). 자연이 불러주는 어떤 시편은 서툴러 보이지만 정직하다. 단순한 진솔함은 무척 힘이 세다. 넘쳐서 적시지도 않고, 모자라 마르지도 않는다. '은현리 사람들/ 솔밭산이 품었다 흘려 보내주는/ 맑은 산 물 받아/ 착하게 나눠 먹고 사는데/ 물값은 사람 머릿수에/ 소의 머릿수를 더하여 셈한다/ 살아 숨쉬는 것들/ 은현리에서는 모두 식구(食口)다'('식구·1'에서).

착한 자연은 시인에게 함께 아파할 줄 아는 섬세한 감성을 일깨운다. 넉넉하고 다사로운 모성을 일러준다. 정씨는 '툭, 칼등으로 쳐서 사과를 혼절시킨 뒤'사과를 깎고 나선 사과야 미안하다, 사과야 미안하다 나지막하게 왼다고 말한다.

경상도 사람인 어머니는 그릇을 '그륵'이라고 쓰고 읽으신다. 그륵, 그륵 중얼거려 보니 그 안에 담겨진 모든 것이 따뜻하고 편안하다. '말 하나가 살아남아 빛나기 위해서는/ 말과 하나가 되는 사랑이 있어야 하는데/ 어머니는 어머니의 삶을 통해 말을 만드셨고/ 나는 사전을 통해 쉽게 말을 찾았다'('어머니의 그륵'에서). 시는 인생으로 쓰여지는 것이다. 죽음 언저리까지 갔다가 돌아온 뒤로 정씨는 그것을 몸으로 알게 됐다. 이번 시집의 시들은 그 깨달음부터 새로 쓴 것이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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