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달초 KT가 단일회사로는 사상최대 규모인 5,500여명의 명예퇴직을 실시한 것을 비롯해 금융권과 대기업 등에서만 올해 안으로 수만 명의 명예퇴직이 시행된다. '평생직장'의 신화가 무너진 지금. 수 십년 젊음을 바친 직장생활을 접고 제2의 인생을 시작해야 하는 퇴직자들의 심정과 관련 전문가들의 조언을 들어본다 /편집자 주● 2003년 10월 명퇴자 김성진씨
김성진(46)씨는 1980년 체신부 9급 공무원으로 입사해 해외전화국, 보급사업단 등을 거쳐 서울 중부영업국 과장을 끝으로 23년간의 직장생활을 끝냈다. 현재 노모와 처(45), 고3 아들, 고1 딸 등과 함께 살고 있다. 주변에서 50대에 퇴직하면 재기 확률이 낮아진다는 얘기들을 많이 해, 더 늦기 전에 제2의 인생을 시작하기로 결심하고 10월 1일 명예퇴직 했다.
김씨는 KT 관계 회사들로부터 일자리 제의를 받기도 했지만, 그런 곳에 재취업한 선배들이 길어야 1년 정도의 '전관 예우'기간이 끝나면 용도 폐기되는 경우를 종종 봐왔기 때문에 고사했다. "막상 퇴직을 하고 나니 무엇부터 준비해야 할지 막막하다"는 김씨는 평소 맛있는 집을 열심히 찾아 다녔던 경험을 살려 친화력이 강한 부인과 함께 자본금 1억원 내외 규모로 외식사업을 하려고 한다.
● 2002년 8월 명퇴자 이성종씨
이성종(40)씨는 한양대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1992년 삼호건설에 입사해 건축, 토목, 입찰, 수주 등의 분야에서 근무하다 2002년 8월 명예퇴직했다. "직장을 다니면서도 언젠가는 나만의 사업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늘 해왔다"는 이씨는 직장생활과 창업준비를 병행하는 것이 쉽지 않아 회사를 그만 둘 결심을 했다.
그 후 3,000만원에서 조금 모자라는 퇴직금과 저축 등을 모아 동네 슈퍼마켓 한쪽에 도넛매장을 열고 1년 넘게 운영해왔다. 1년 동안 쉰 날은 10일도 안될 만큼 열심히 일했지만, 매출은 본인 인건비나 겨우 건지는 수준이어서 얼마 전 매장을 정리했다. 직장에서는 지방을 떠돌아다니느라, 창업 후에는 여가가 없어 아직까지 독신인 이씨는 최근 자신의 요리솜씨를 살릴 수 있는 국수 전문점을 창업하기 위해 분주히 노하우를 쌓고 있다.
재출발은 퇴직 1년 후가 적당
구본형 저도 3년 전에 직장을 그만두었기 때문에 두 분의 심정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전 40대 퇴직자들에게 적어도 2개월 정도는 여행 등을 통해 자신을 성찰할 기회를 가지라고 권합니다. 초조함 때문에 성급하게 낯선 분야에 뛰어든다면 실패할 확률이 높습니다. 자신이 차분해졌다고 느껴진다면 그 때가 바로 새로운 게임에 참가할 준비가 된 때 입니다.
이인호 퇴직 직후에는 가족의 시선도 부담스럽습니다. 퇴직 후 갈 곳이 없는 분들을 위한 전직지원센터 같은 공간이 더 많이 늘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창업시기는 퇴직 1년 후 정도로 잡는 것이 좋습니다. 너무 빠르면 준비가 부족하고, 또 1년이 넘으면 창업의지가 감소할 우려가 크기 때문입니다.
유망직종보다 적성을 먼저 찾아라
구본형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일이 내 적성에 맞느냐 하는 것입니다. 모처럼 찾아온 '제2의 인생'의 기회를 첫 직장처럼 또다시 수동적으로 선택하실 생각입니까? 우선 자신의 적성을 꼼꼼히 분석해, 자신이 어떤 분야의 일을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얻어야 합니다.
그 후 번화가를 걸으며 간판을 유심히 살펴보십시오. 거기서 마음에 드는 직종을 30개쯤 고른 후, '내가 어떤 업종의 사장이 되면 행복할 수 있을까' 비교 검토해보면 자신에게 적합한 창업업종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언론에서 '유망업종'이라고 추천하는 아이템을 너무 과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언론에 오르내리는 업종은 이미 성수기에 도달한 업종일 경우가 많습니다.
김성진 맡은 분야의 일만 알고 있던 직장인들의 경우 퇴직 후 운신의 폭이 상당히 제한됩니다. 원하는 제2의 인생을 선택하기 위해서 상당기간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명예퇴직을 실시하는 기업 중에서 명퇴 신청자에게 재교육 기회를 제공하는 기업이 거의 없습니다. 정부가 제공하는 재교육 프로그램도 도배사, PC정비사 등에 불과해 지나치게 빈약합니다.
기업·정부 퇴직자 재교육 적극나서야
이인호 98년 외환위기 이후 40, 50대 명퇴자는 총 67만명에 이릅니다. 하지만 국내에서 아웃플레이스먼트(퇴직자 재교육)를 제공하는 기업은 일부 외국계를 중심으로 6%에 불과합니다. 반면 미국·일본의 경우 90%의 기업에서 아웃플레이스먼트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대개 퇴직희망자의 자기진단과 재취업교육 등을 6개월 정도 실시합니다.
구본형 정부와 기업이 보다 적극적으로 퇴직자 재교육에 나서야 하겠지만, 어차피 제도적 도움은 부분적인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진로는 자신이 찾아야 합니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가족에게 기대십시오. 많은 중년 남성들이 퇴직 후 아내가 돈벌이에 나서는 것을 용인하지 못합니다. 만약 창업을 한다면 가족기업이라는 개념을 가져야 합니다. 처가 창업에 더 적합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면, 남편은 홍보, 인력관리 등 지원업무를 맡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이성종 저는 칼국수, 콩국수 등을 계절에 따라 제공하는 국수 전문점 창업을 구상 중입니다. 제가 국수를 좋아하거든요. 음식을 만드는 것은 자신이 있는데, 종업원 관리 등 경영측면에서 자신이 없습니다.
가장 큰 경쟁자는 과거의 자신
구본형 '국수를 좋아해 국수 전문점을 하겠다'는 것은 좋은 착안입니다. 그런데 모든 업체에서 대개 3분의1의 업체는 즉시 망하고, 3분의1은 개점휴업 나머지 3분의1 만이 돈을 법니다. 이처럼 치열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5가지 성패요소를 잘 고려해야 하는데, 이를 '1+1+3'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비즈니스 경쟁력의 5가지 요소는 제품, 가격, 서비스, 체험, 접근성입니다. 이중 최소한 한가지는 업계에서 1위를, 또 한가지는 2위를 유지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입지가 좋지 않은 음식점이라도 뛰어난 맛 즉 제품 경쟁력이나 극진한 서비스가 있다면 이익을 내는 3분의1에 속할 수 있습니다.
이인호 창업에 성공하려면 창업자의 노력 외에도 경기, 트렌드 등 외부적 요인도 고려해야 합니다. 분식전문점은 경기변동에 영향도 덜 받고, 저가상품 중에서는 이윤도 높은 편이라 지금 같은 불경기에 적합한 창업 아이템입니다. 반면 유행상품을 취급하는 유통점은 지금 창업하면 성공하기 대단히 어렵습니다. 외식업의 경우 서구형 패스트푸드점도 피해야 할 아이템입니다.
이성종 제2인생을 시작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자신감이 아닐까 합니다. 퇴직 후 1년 동안 여러 가지 경험을 하면서, 문득 직장에 사표를 낼 때의 결연한 의지가 많이 퇴색된 것이 아닌가 되묻게 되곤 합니다. 이럴 땐 용기를 줄 수 있는 책을 읽으며 마음을 다 잡습니다.
구본형 우선 자신의 경쟁상대를 '과거의 자신'이라 생각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적을 만들 필요도 없이 스스로 계속 향상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히트 상품이 우연한 결과로 보이지만 그걸 한발 앞서 알아보는 사람은 준비된 사람입니다. 또 남에게 베푸십시오. 그래야 언젠가는 자신도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운이란 결국 중요한 고비에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리 정영오기자 young5@hk.co.kr 사진 김주성기자
● "평생직업" 9가지 원칙
1. 떠나야 할 곳에서 떠나라
남아서 승부를 걸어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미련 없이 떠나야 할 때도 있다. 시기를 놓치면 등 떠밀려 나와야 한다.
2. 감정을 경영하지 못하면 두려움을 넘어설 수 없다.
감정을 경영할 수 없으면 지금에서 벗어날 수 없고, 미래 속에서 빛을 찾을 수도 없다.
3. 어리석은 일관성을 버려라.
직장인이 직장을 떠나면 할 수 있는 일이 막연하다고 생각한다. 천만에 말씀. 어리석은 일관성, 그게 바로 스스로 판 함정이다.
4. 유망 직종은 없다.
누구에게나 맞는 유망 직종은 없다. 유행 직종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평생직업이다. 따라서 이렇게 질문 해야 한다. "나에게 맞는 유망직종은 무엇인가?"
5. 가장 까다로운 고객, 아내를 동지로 삼아라.
아내는 가장 까다로운 고객이다. 아내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면 다른 고객들을 설득하기는 오히려 쉽다. 아내를 완벽한 동지로 만들어라.
6. 현장만이 현실이다.
현장이 시장이고 고객이다. 모든 발견과 깨달음은 이곳에서 이뤄져야 한다. 철저하게 준비하라. 그리고 현장에서 확인하라.
7. 비즈니스는 고객이다.
고객이 원하는 것들 중 한가지는 반드시 절대 수준에 도전하라. 또 한가지에는 차별적 수준을 확보하라.
나머지 세 가지에서는 허용 수준을 유지하라. 결코 패하지 않는다.
8. 다른 사람들이 먼저 간 길에는 내 길이 없다.
나만의 방식이 없으면 돈과 재물도 없다. 모방과 추종은 유행의 치명적 약점이다.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가장 나다운 것만이 무덤까지 함께 가져가는 유일한 것이다.
9. 자신의 세계에 충실한 '작은 독재자'가 되라.
자신만의 비즈니스 룰이 지배하는 작은 세계를 건설하라. 이 세상에서 가장 독특하고 아름다운 기업을 하나 세워라.
/구본형 저 '내가 직업이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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