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가을 미국 수도 워싱턴 일대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연쇄 저격사건의 재판이 14일 시작됐다. 지난해 10월2일 첫 총격을 시작으로 '10월의 3주간'동안 13건의 총격에 10명을 목숨을 앗아간 희대의 살인극은 첫 사건 발생 20일 만에 두 용의자 존 앨런 무하마드(42)와 리 보이드 말보(18)가 검거됨으로써 막을 내렸었다.검거 당시 타고 있던 승용차 안에서 발견된 소총과 탄알, 범행 현장에서 남겨진 지문과 DNA 검사 결과 등 숱한 흔적만으로도 두 용의자의 유죄를 예단하는 관측들이 나올 만하다. 하지만 이번 사건의 속성과 미국의 사법 제도는 그런 뻔한 결론을 허락하지 않는다.
14일 버지니아주 버지니아 비치의 법원에 첫 모습을 드러낸 무하마드는 4차례나 분명하고 강한 톤으로 무죄를 주장, 앞으로 6주간 지속될 재판의 파란을 예고했다. 벌써부터 미국의 언론들은 'OJ 심슨 사건'과 이번 사건을 비교하며 흥미 진진한 법정 드라마의 전개를 예상하고 있다.
누가 방아쇠를 당겼나
무하마드에게 적용된 죄목은 3년 이내 1명 이상을 살해한 일급 살인죄와 9·11 이후 통과된 반 테러법 위반 등 4가지. 죄목은 버지니아 주법상 살인죄와 반테러법 중 한가지만 유죄가 확정돼도 사형 선고가 가능하다. 사형제도 옹호론자인 존 애쉬크로프트 법무장관이 7건의 저격사건이 발생한 메릴랜드 주를 놔두고 버지니아 주를 첫 재판 관할지로 결정한 이유도 버지니아 주에서 사형선고와 집행이 비교적 많이 이뤄진 점을 감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버지니아 주법은 전통적으로 총격살인 사건에서 방아쇠를 당긴 피의자에게만 사형선고를 허용해 왔다. 바로 이 조항이 무하마드를 위한 최선의 방어무기가 될 수 있다.
국선 변호인인 피터 그린스펀(50)과 조나던 샤피로(54) 변호사는 모하마드는 결코 스나이퍼(저격수) 역할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할 것으로 보인다.
검찰 측도 무하마드와 저격 행위를 연결할 직접 증거가 없다는 점을 인정한다. 무엇보다 그의 손에 총기가 들려 있는 모습을 목격한 증인은 아무도 없다. 압수된 223 구경 부시마스터 소총이나 DNA 샘플 감식 결과 등 제시된 증거물은 저격 행위의 정황만을 보여주는 간접 증거들이다.
때문에 검찰은 '복식 살인조'의 통제자로 몰아가는 전략을 세울 것으로 예상된다. 누가 방아쇠를 당겼는지에 관계없이 저격행위를 실제 조종했다면 실행범과 같은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이다. 12명 이상의 일급 살인범을 형장에 보낸 경력이 있는 폴 엘버트(66) 주 검사는 이날 배심원단 선정 과정에서 41살의 성인이 17세 소년을 지시할 수 없다고 보는지를 집중적으로 물어 이 전략에 역점을 두고 있음을 시사했다.
반 테러법 적용 논란
검찰이 9·11 테러 후 주 의회가 통과한 반 테러법을 처음으로 이번 사건에 적용한 까닭도 저격 실행자에 대한 '입증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법은 살인이 대중을 위협하고 정부에 영향을 미칠 목적으로 한 것인가를 입증하면 범인을 중죄로 다스릴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를 위해 검찰은 저격의 동기가 1,000만 달러를 정부에 요구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을 집중 부각할 생각이다.
그러나 이번 저격 행위는 테러와는 무관하며, 반테러법 자체가 위헌적인 요소가 있다는 주장을 펼칠 변호인단의 반격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말보는 정신 이상?
무하마드는 말보와는 떨어져 재판을 받는다. 범행 당시 17세였던 말보가 분리 재판을 원했기 때문이다. 말보의 재판은 11월부터 별도로 진행된다.
재판 전략도 서로 다르다. 말보의 국선 변호인들은 말보가 범행 당시 정상적인 정신 상태가 아닌 상태에서 무하마드로부터 세뇌를 받아 범행을 했음을 입증하는 방법으로 사형을 면하도록 하는 전략을 허용해줄 것을 법원에 요청해 놓고 있다. 한 때 아버지와 아들 사이로 지낼 만큼 가까웠던 두 사람이 생존을 위해 서로를 공격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게 된 것이다. 검찰이 무하마드에 대한 유죄 입증이 여의치 않을 경우 말보와 사형을 면해주는 조건으로 거래를 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기도 한다.
열쇠는 배심원에
12명의 배심원들이 각종 정황 증거를 어떻게 판단할지가 이번 사건 재판의 최대 관심이다. 배심원들은 각종 참고인 증언뿐 아니라 최첨단 탄환 분석 기법 등의 증거 가치를 판단, 유무죄 평결을 내리게 된다. 워싱턴 포스트는 "이번 재판은 배심원들에게 범죄 분석 세미나처럼 느껴질 것"이라고 말했다.
/워싱턴=김승일특파원 ksi810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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