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민주화 발자취-6·3사태에서 6월항쟁까지]<22>민청학련(下)-속전속결 군사재판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민주화 발자취-6·3사태에서 6월항쟁까지]<22>민청학련(下)-속전속결 군사재판

입력
2003.10.17 00:00
0 0

1974년 1월을 죽음이라 부르자/ 오후의 거리, 방송을 듣고 사라지던/ 네 눈 속의 빛을 죽음이라 부르자/ 좁고 추운 네 가슴에 얼어붙은 피가 터져/ 따스하게 이제 막 흐르기 시작하던/ 그 시간/ 다시 쳐 온 눈보라를 죽음이라 부르자/ 모두들 끌려가고 서투른 너 홀로 뒤에 남긴 채/ 먼 바다로 나만이 몸을 숨긴 날…바람 찬 저 거리에도/ 언젠가는 돌아올 봄날의 하늬 꽃샘을 뚫고/ 나올 꽃들의 잎새들의/ 언젠가는 터져 나올 그 함성을/ 못 믿는 이 마음을 죽음이라 부르자/ 아 아 1974년 1월의 죽음을 두고/ 우리 그것을 배신이라 부르자/ 온몸을 흔들어, 온몸을 흔들어/ 거절하자…

김지하의 시 '1974년 1월'은 그가 긴급조치 1·2호 발동 후 강릉에 피신해 있을 때 지었다. 4월 25일 민청학련 사건의 전모가 발표되던 날 새벽 그는 전남 목포 앞 대흑산도 한 여관에서 체포됐다. 스스로 조감독으로 참여한 영화 '청녀(靑女)'의 촬영반이 투숙하고 있던 곳이었다. 수갑을 찬 채 고향인 목포항에 내려섰다. 그의 옥중 시는 그가 비로소 생사를 결단했음을 말하고 있다.

못 돌아가리/한번 디뎌 여기 잠들면/육신 깊이 내린 잠/저 잠의 하얀 방, 저 밑 모를 어지러움/…/내 피를 부른다/거절하라고/그 어떤 거짓도 거절하라고/…

수사와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민청학련과 인혁당재건위가 태어나기 전부터 관련자들의 계보도와 역할표를 완벽하게 만들어 놓고 있었던 중앙정보부는 대상자들이 검거될 때 마다 차곡차곡 끼워 넣기만 하면 됐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프로크루스테스'의 쇠침대를 연상케 하는 상황이었다.

긴급조치4호를 발표하면서 정부는 민청학련 관련자들이 8일까지 자수할 것을 권유했다. 자진 신고한 사람 261명을 포함해 모두 1,024명이 수사를 받았다. 5월 27일 검찰은 제1차로 일본인 2명 등 55명(민청학련 관련 32명, 인혁당재건위 관련 21명)을 긴급조치4호, 국가보안법, 반공법, 내란예비음모, 내란선동, 긴급조치1호 위반이란 어마어마하고 다양한 죄목으로 기소했다.

6월 15일 오전 삼각지 국방부 뒤쪽 비상보통군법회의실에서 민청학련 관계자 32명에 대한 첫 공판이 이뤄졌다. 피고인만으로 의자 넉 줄을 차지했다. 피고인 1인당 한명의 가족만 입장이 허용됐다. 나머지 자리는 재판관계자와 중정 요원, 취재와 기록이 거부된 국방부 출입기자들이 메웠다. 재판은 민청학련(1심판부), 인혁당재권위(2심판부), 일본인(3심판부) 등으로 분리 진행됐다. 민청학련 관련 재판장은 박희동(朴熙東) 당시 육군 중장이었다. 발언 제지, 경고, 휴정, 퇴정 명령, 항의 소동이 이어지는 가운데 재판은 사상 유례없는 스피드로 나아갔다.

7월 8일 인혁당재건위 관련, 7명에 사형, 8명에 무기징역, 6명에 징역20년이 구형됐다. 다음날 민청학련 관련 7명에 사형, 7명에 무기징역, 12명에 징역20년, 6명에 징역15년이 구형됐다. 곧이어 11일과 13일 열린 선고공판에서 재판부는 검찰의 구형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였다. 사람들은 '정찰제 판결'이라 불렀다. 2명의 일본인에게도 징역20년이 선고됐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외국의 반향은 컸다. 특히 뉴욕타임스는 주일 미국대사였던 라이샤워씨의 기고 '비참한 길을 걷는 한국'(6월 8일자)을 싣고 "박정희의 근대민주주의는 조지 오웰의 1인 전제정치이다. 미국은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삭감해야 한다"고 보도했다. 이어 7월 22일에는 '한국에 있어서의 탄압'이란 사설을 게재, "북한과 구별하기 힘든 독재가 계속된다면 주한미군의 장기주둔은 기대할 수 없다. 워싱턴과 도쿄가 공동으로 한국에 대한 정책을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재일대한민국거류민단, 일본의 변호사·국회의원·교수 연대, 미국 프랑스 일본의 문화인 33인, 엠네스티 인터내셔널, 뉴욕 기독교단체 등 각종 단체에서 성명서를 발표하고 항의서한을 보냈다. 여기에 워싱턴포스트와 더 타임스도 유신정권의 독재와 탄압 실태를 상세히 보도했다. 이러한 내용은 국내 언론에 소개되지는 못했지만 외지와 유인물 등을 통해 대학과 기독교·카톨릭계를 중심으로 하염없이 퍼져나갔다.

이 과정에서 강신옥(姜信玉·당시 38세) 변호사가 법정에서 긴급조치4호를 위반하는 내용의 변론을 했다는 이유로 15일 구속됐다. 강 변호사는 9일 변론에서 "법은 정치와 권력의 시녀다. 이것은 사법살인이다. 직업이 변호인이 아니라면 피고인석에 앉아 있고 싶다. 악법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그의 구속 사실은 언론에 보도되지 못했으나 한달 뒤 법무장관의 국회보고 내용으로 알려졌다. 그는 1심과 2심에서 징역10년 자격정지10년을 선고 받았다. 강 변호사는 이듬해 2월 긴급조치 위반자에 대한 '국민총화 석방' 때 풀려났다. 그의 상고심은 대법원에서 계속 계류되다가 87년 6월 항쟁을 전후한 시기에야 열렸다. 대법원은 사건을 파기 환송했다. 88년 3월 4일 서울고법 형사1부는 무죄를 선고하며 "사법살인이란 대목은 재판부에 오판의 위험을 환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변호사는 형사피고인의 방어권을 위해 충분하고도 자유로운 공격·방어권이 보장돼야 한다"고 밝혔다. 유신정권의 변호인 탄압이 이처럼 '변론 장전'을 만드는 결과가 됐다.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정병진 편집위원 bjjung@hk.co.kr

■ 강신옥 변호사

자연스럽게 대규모 인권변호인단이 구성됐다. 김지하가 구속되자 백낙청 교수가 나에게 그의 변호를 위임해 왔다. 이어 황인성 등 KSCF 관련 학생들과 여정남 나병식 유근일 등 9명의 변호를 맡았다. 여정남의 경우 국선변호인이 선임됐는데 그 분이 나의 은사여서 내가 대신 맡겠다고 했다. 재판 3일 전에야 피고인 면회가 허용됐다. 한결같이 고문 당한 사실을 호소했고, 공산주의자가 아님을 강조했다. 허위자백만으로 재판을 하자는 것이었다. 변호인들이 몇몇 증인을 신청했으나 모두 기각 됐다.

헌법을 비방하면 징역15년에 처한다(긴급조치1·2호)는 것은 법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긴급조치4호가 발표됐다. 민청학련이란 단체가 며칠 뒤에 데모한다는 것을 알고 아예 그들을 범죄집단으로 단정하고, 재판도 안하고, 관련자를 사형이나 무기, 징역15년을 때리겠다는 것은 법일 수 없었다. 히틀러 때의 파시스트 재판이고, 소련의 스탈린 재판, 박헌영에 대한 북한의 재판과 다름이 없었다. 더구나 학생들에게 무더기로 사형과 무기징역을 구형하는 것을 보고 참을 수 없었다.

나는 황인철(黃仁喆) 홍성우(洪性宇) 변호사에 이어 3번째로 변론을 했다. "이것은 쇼며 캐리커쳐다. 사법의 이름으로 살인을 하는, 사법살인이다. 기성세대가 할 일을 못하니 얘들이 하자고 하는데 그 이유로 학생들에게 사형에 처한다면 차라리 나도 피고인과 똑 같은 심정으로 저 자리에 않고 싶다"고 말했다. 재판장(박희동·朴熙東 육군중장)이 몇 번이고 책상을 탕탕 치며 "변론을 삼가하라. 법정모독이다"고 소리쳤다. 러시아 니콜라스 황제 때 역사가 차데이프의 진술을 인용했다. "그가 반정부 발언을 하자 황제가 미친놈이라고 했다. 그러자 차데이프는 '나를 사랑하는 내가 왜 미쳤냐. 자신에 눈감은 너희가 미친 것이다'고 외쳤다"고 말하는 순간 재판장이 휴정을 선언했다.

휴게실에서 피고인 가족과 동료 변호사가 "그 정도면 됐다. 몸조심 하라"며 말리기도 했다. 30분 뒤 재판이 속개됐다. "김지하가 좋은 민족시를 쓴 것이 국가변란이냐"며 변론을 마무리 했다. 피고인 최후진술이 시작되려는 순간 방청석에 있던 중정요원 2명이 다가았다. 그들은 "당신 가방이 어느 것이냐"고 물으며 나가자고 했다. 최후진술을 들어야 한다고 했으나 잠시면 된다고 재촉했다. 오후 6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100m쯤 떨어진 육본 콘세트 막사로 데려갔다. 그들은 변론요지를 적은 메모장을 빼앗고는 "왜 그런 말을 했느냐. 저의가 무엇이냐"며 물었다. 2시간 정도 조사를 받고 나오니 재판은 끝나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으며 아내에게 "내 아들을 절대로 법대에 보내지 않겠다"며 허탈해 했다(아들은 법대를 나와 고법 판사로 근무하고 있다). 새벽 1시쯤 중정 직원이 문을 두드렸다. 그는 "부장님이 잠시 뵙자고 한다"며 동행을 요청했다. "아까 다 말했는데 뭘 또 하냐"며 고무신을 끌고 나섰다. 집 앞에 있는 짚차에 태우더니 바로 남산으로 달렸다. 방에 들어서니 몇몇이 야전침대 각목을 들고 기다리고 있다가 다짜고짜로 두들겨 패더라. 그들은 "경상도 놈이 그럴 수 있느냐. 전라도 출신인 H 변호사도 그런 말을 안 하는데"하며 난리를 쳤다. 어디서 '삐'하고 벨 소리가 나더니 '데려와'하는 인터폰 음성이 들렸다. 위층으로 끌려가니 당시 중정6국장 이모씨 방이었다. "이럴 수 있느냐"고 항의하자 그는 인터폰으로 "왜 함부로 대했느냐"며 나무라는 시늉을 했다. 같은 질문과 같은 대답으로 나흘을 끌더니 '나가라. 석방이다'며 풀어줬다. 홍성우 변호사도 나처럼 붙들려 조사를 받고 나갔음을 알았다.

변호사 사무실에 출근하며 며칠이 지났다. 내한한 일본 교수들과 약속이 있어 나가려는 데 또 그들이 나타났다. "다시 좀 가셔야겠다"고 말했다. 일이 잘 안된 모양이라고 직감했다. 당시 '이광요에 대한 비판'이란 책을 들고 있었는데 예감이 이상해 그것을 서랍 속에 던져놓고 나왔다. 영국 기자가 쓴 그 책은 '이광요도 결국은 독재자'라는 내용이었다. 나중에 그것을 읽은 것까지 문제가 됐다. 남산에 갔더니 이미 영장이 나와 있었다. 그냥 넘기려 했으나 위에서 특별지시가 내려왔다고 했다. 다음날 아침 서대문 구치소로 넘겨졌다.

며칠 뒤 새벽1시에 건장한 청년 3∼4명이 우리 집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가택수색을 핑계로 웃통을 벗고 등과 팔의 문신을 보여주며 아내와 아이들만 있는 집안을 휘젓고 다녔다(나중에 들은 얘기). 가족들에게 겁을 주려고 했던 것이다. 석방 때까지 가족 면회가 금지됐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