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의 재신임 폭탄선언을 두고 승부수니, 가진 돈을 모두 털어 넣는 도박판의 '올 인'이니 하는 비유가 쏟아지더니 며칠 전에는 '러시안 룰렛'으로 묘사한 한국일보 만평이 실렸다. 러시안 룰렛은 회전식 연발 권총에 총알 한 발을 잰 뒤 몇 사람이 차례로 자기 머리에 총구를 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그야말로 목숨을 건 내기이다.■ 만평 내용에 절로 웃음이 난다. 지난 대선 때 여론조사에 뒤지면서도 후보단일화를 수용한 노무현 후보가 머리에 총구를 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그를 흔들어 온 후단협측이 정몽준 후보에게 속삭인다. "죽기 밖에 더 하겠어?" 이어 다음 장면에서는 노 대통령이 '재신임 권총'을 머리에 가져가자 놀란 민주당측이 "혹시라도 살아나면 어쩌려고" 하며 말린다.
■ 재신임 제안을 순수한 결단으로 생각하고픈 청와대는 승부수니, 도박이니 하는 비유가 못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승부수도 아무나 걸 수 있는 게 아니니 서운해 할 것 없다. 노 대통령 말대로 밑천이 있어야 한다. 노 대통령은 원칙주의자의 면모를 분명히 지니고 있었다. 결벽증 이미지도 느끼게 했다. 그는 결과가 뻔히 보이는데도 지역주의의 벽에 몇 번씩 몸을 던졌다. 의원직을 팽개친 적도 있다. 훗날을 기약한 행동이었다는 해석도 하지만, 그것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지난 대선 마지막 날 밤, 정몽준 씨의 황당한 지지철회 선언이 나온 직후 민주당 지도부에 이끌려 정씨 집으로 가며 그는 "당신들과 정치 같이 못해 먹겠다"고 버텼다. 원칙 때문이었다. 느닷없는 재신임 요구를 국민들이 한 목소리로 들고 일어나 반대하지는 않는 이유가 될 것이다.
■ 러시안 룰렛은 이미 약발을 보이고 있다. 여론조사 결과가 우선 그렇다. 대통령이 머리에 총을 대고 있는데 마음 약한 국민들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하지 않으려 한다. "내가 방아쇠를 당겼을 때…" 이런 생각일 것이다. 문제는 러시안 룰렛의 끝이다. 노 대통령이 이기면 그것으로 모든 상황이 깨끗이 정리될 수 있는가. 집사 최도술씨 비리 같은, 재신임을 몰고 온 문제들이 없던 일이 되는가. 반대로 대통령이 잘 못 될 경우, 과거 승부수를 던졌다가 총선에서 지거나 후보직을 잃거나 하는, 개인이나 정당의 일로 끝날 수 있는가. 총구를 머리에 댄 것은 국민일 수 있다는 생각이 그래서 든다.
/최규식 논설위원 kscho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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