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탄한 중견 식품기업으로 성장한 풀무원은 풀무원농장에서 나오는 유기농산물 판매로부터 출발했다. 여기에 내가 근 50년간 이끌어온 풀무원농장과 같은 이름까지 사용하고 있어 "풀무원 회장이시냐, 풀무원과의 어떤 관계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유기농에 바탕한 생명정신을 풀무원에 전해준 기업의 정신적인 창업자일뿐, 회사운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물론 최근까지 내가 풀무원의 고문이자 감사의 역할을 해오긴 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아들 혜영이가 "기업이 커나가면서 처음 정신을 잃을 수도 있다"며 나에게 기업을 감시하란 뜻에서 감사를 맡을 것을 주문했고 남승우 사장도 흔쾌히 응락해서 하게 된 것이다. 혜영이가 초기에 고전하다 남 사장에게 경영을 전담토록 하긴 했지만 기업에서 완전히 손을 뗀 것이 아니라 합작형태로 기업을 운영하던 때다. 나의 감시와는 무관하게 풀무원은 지금까지 친환경기업으로서의 이미지를 잘 지켜내고 있다. 내가 뿌린 생명정신을 어기며 기업활동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수년전 풀무원에서 '찬마루'라는 새로운 브랜드를 도입할 때는 내가 적절히 견제를 하기도 했다. 당시 풀무원은 우리 농산물을 원료로 한 가공식품만 만들고 있었는데 시장수요를 따라가면서 기업의 규모를 늘리기 위해 수입콩을 원료로 한 두부 등 가공식품을 만들어 팔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런데 회사에서 '풀무원이라는 브랜드를 그대로 사용해도 되겠느냐'는 식으로 나에게 자문을 구해왔다. 나는 그래서 "풀무원은 무공해 유기농이라는 깨끗한 이미지를 먹고 살기 때문에 풀무원 브랜드말고 다른 브랜드를 개발하는 게 낫다"는 중재안을 제시했다. 수입콩으로 만든 두부라는 사실을 제품에 명기한 '찬마루'라는 새로운 브랜드는 그렇게 세상에 나오게 됐다.
풀무원 초기에는 무고와 질시도 끊이지 않았다. 풀무원이 빠르게 성장하는 것에 배가 아픈 사람들이 있었던지 '영부인이 풀무원을 뒤에서 밀고있다', '문선명씨가 풀무원의 실질적인 배후다'는 등의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나오는가 하면 실제 경찰이 조사를 나오기도 했다. 한번은 농장으로 2∼3명의 청년들이 찾아와서는 "진짜 농약을 치지 않느냐, 퇴비는 어떻게 만드느냐"는 등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이상하다 싶어 정체를 물었더니 한참을 머뭇거리던 이 사람들이 "사실은 경찰인데 풀무원농장에서 농약과 화학비료를 사용한다는 고발이 들어와서 조사를 나왔다"고 실토하는 게 아닌가. 어이가 없어 한참을 웃다 "맘껏 농장을 살펴보라"고 했더니 이 사람들도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되돌아갔다.
풀무원은 특히 80년대 후반부터 나의 사회활동이나 공동체 생활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는다. 우선 농장에서 나오는 유기농산물을 풀무원이 수매해 갔고 농장에서는 풀무원에서 판매하는 가공식품의 위탁생산을 시작했다.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하게 될 한국기아대책기구의 활동에도 풀무원이 직접 나서 도움을 줬고 환경운동에도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풀무원이 없었다면 한삶회공동체의 자립도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공동체 자체가 자립하기 어려운 마당에 유기농까지 겸했으니 판로가 확보되지 않았다면 아마 풀무원농장도 문을 닫지 않았을까 싶다. 공동체가 어렵다는 것은 다른 공동체의 운명을 봐도 알 수 있는데 김진홍 목사가 운영하던 두레마을의 경우 자립도가 겨우 60∼70%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또 토리신부가 강원도 태백에서 운영하던 기독교 공동체는 겨울에 먹을 것이 없을 정도로 힘겨웠다는 말도 들었다. 사정이 그러했으니 풀무원은 우리 공동체를 살린 일등공신인 셈이다. 지금은 풀무원에서 250여 농가의 농산물을 소화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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